매일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는 작은 아이와 오랜만에 나왔다. 8살 작은 몸에서 에너지를 방출해야 되는데 너무 집에서 틀어박혀 있었나 보다. 날씨가 화창해서 놀이터로 갔다.
놀이터에 가도 혼자 놀아야 하니 김이 좀 새나 보다. 그네만 조금 뛰다가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장으로 갔다.
초여름이라 채소들이 많다. 집에 늘 구비되어있는 양파, 감자, 호박서부터 가지도 제법 싱싱해 보였다. 여름 가지만큼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가지무침과 제철 반찬을 만들어볼 요량으로 한 무더기씩 구매했다.
가지는 뚱뚱한 녀석보다 갸름하고 너무 길지 않은 녀석들로 골랐다. 가지 꼭지엔 가시가 있어서 꼭지 딸 때는 조심해야 한다. 가지를 반으로 가르고 찜통에서 찐다. 너무 오래 찌면 흐물거리는 식감 때문에 식구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찌고 나서 결을 가를 때 뭉개지지 않고 쪽쪽 찢어지게끔 쪄야 한다. 찌는 시간이 조금씩 달라서 가지 찔 때는 불 옆을 떠나지 못한다. 김이 올라올 때 가지의 상태를 조금씩 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 어슷하게 잘라서 볶기도 한다. 간장과 고춧가루를 섞어서 볶기도 하고 굴소스를 넣어 볶기도 한다. 어느 것과도 잘 조화로워 맛있다. 보통은 작은 아이가 고춧가루 들어간 음식은 잘 못 먹기 때문에 가지 무침을 하던가 심심하게 볶아낸다.
오늘은 찜통에 쪄서 조물조물 무칠 생각이다. 쪄내고 한 김 식혀서 결대로 쪽쪽 찢어낸다. 찢어낼 때 아이들이 한 입만 달라고 작은 입을 내민다. 양념도 하지 않았지만 달큼한 채소 맛이 좋은지 한번 오고 두 번, 세 번 이어진다. 이렇게 먹다 보면 무쳐낼 반찬도 없을 듯하다.
조선간장, 곱게 다진 마늘 약간 쪽파를 송송 썰어 양념이랑 무치고 마지만 참기름이나 들기름으로 마무리한다. 오늘은 좋은 들기름이 있어서 들기름으로 맛에 포인트를 주었다. 향이 그윽하여 집안에 들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들기름이 있으니 두부도 프라이팬에 부쳐내야겠다. 들기름은 발연점이 낮아 식용유와 섞어 쓴다. 노릇노릇한 두부만 구워냈는데도 아이들은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킨다. 맛간장에 고춧가루 마늘, 파, 깨, 매실청을 넣고 양념장을 만들어 두부조림을 해도 그만이다. 아이들은 구운 두부를 더 좋아해서 담백하게 먹을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애호박 볶음과 마늘종 무침을 낼 예정이다. 햇마늘종은 지금 아니면 맛보기가 힘들다. 마늘보다는 맛도 연하고 살짝 데쳐서 새콤하게 조물조물 무치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애호박은 새우젓으로 볶아내야 맛이 좋다. 소금으로 볶았을 때와 차이가 많아서 애호박만큼은 새우젓으로 볶아낸다. 살캉살캉하게 씹힐 정도로 볶아내려면 반쯤 익었다 싶을 때 불을 꺼주는 것이 좋다. 호박은 잔열로도 익기 때문이다. 다진 마늘과 약간의 쪽파, 예쁜 색깔의 당근을 얇게 채 썰어 마무리로 볶어낸다. 냉장고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 맛이 떨어지니 딱 한 끼 먹을 분량만 볶아낸다.
내가 좋아하는 채소반찬 가득한 밥상이다. 여름이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밥과 반찬을 먹다가 지루해지면 커다란 양은 볼을 내온다. 갖은 나물를 넣고 고추장 한 숟가락에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쓱쓱 비벼낸다. 시원한 콩나물 국만 끓여내도 풍성한 한 끼 밥상이 완성된다.
직장 다닐 때 채소나 나물로 반찬을 해가면 인기가 좋았다. 살림이 서툰 친구들이 어떻게 하냐고 묻기도 했다. 채소반찬은 휘리릭 할 수 있는 음식이라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서 바쁜 아침시간지만 준비해서 싸 온다 하니 그것도 신기해했다.
예전 친정 엄마도 언제나 휘리릭 만들어 주셨었는데... 지금의 나보다도 더 그랬던 것 같다. 뭐든지 뚝딱뚝딱 잘 만들어주셨다. 맛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늘 푸짐히 만들어주신 기억이 있다. 나도 20년 가까이 솥뚜껑만 운전하다 보니 휘리릭의 내공이 쌓인다.
요즘 트로트의 대세 중 대세인 송가인은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를 연습했는데 앞 초입 부분 “미~” 연습만 3,000번이 넘도록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맛깔스럽게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살림에서 깨달은 휘리릭의 마법이지만 내 인생의 마법이기도 하다. 나물 하나 살캉히 볶아내는 것도 15년이란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의 마법이란 것이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시간은 존재하는 것 같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해서 다 육아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농도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휘리릭의 마법이란 건 어쩜 내공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요즘 요리할 때 작은 아이가 내 옆에 찰싹 붙어있다. 엄마를 도와준다는 것이 목적이지만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큰 것 같다. 아이에게 달걀 5개만 볼에 깨서 휘저어 놓으라고 시켰다. 너무나 기뻐하며 조심조심 작은 그릇에 달걀을 꺼낸다. 달걀을 깨서 큰 볼에 담는 과정이 쉽지 않다. 깨끗이 깨어지지가 않아서 달걀 껍데기가 자꾸 볼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달걀 하나 깨고 들어간 껍질까지 빼내니 시간이 여간 걸리는 것이 아니다. 8살 아이라 서툰면이 있지만 어른이라도 처음 하는 일이라면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머리가 좋아서 또는 일머리가 있어서 약간은 빨리 배운다 하더라도 배움의 전체 시간을 놓고 보면 약간의 차이일 뿐이다. 휘리릭의 마법은 내가 들인 시간의 보답이다.
오늘도 휘리릭 저녁찬 서너 가지를 만들었다. 맛있게 먹을 남편과 아이들을 생각하니 만드는 내내 기분이 좋다. 귀한 음식 보약처럼 쓰이라는 마음속 기도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