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 May 21. 2020

내가 꼴리는 대로 살기로 했다

시댁에서 분가를 한지 만 3년이 다 되어간다. 분가를 하는 과정도 힘들었고 나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님은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던 시어머니는 억세어라 금순아 같은 이미지일 듯 하지만 공주과에 속하신다. 외적으로는 아니지만 타고난 성격이 그러하신 듯하다. 아버님과 두 아들들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어머니가 하는 일이라면 세 남자가 극구 따지며 반대했던 일들이 허다했을 터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자신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는 두 아들들한테 많은 것들을 의지하신다. 어머니도 이제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아들들은 서로 앞다투어 어머니를 살뜰히 살핀다. 시아버님은 혼자되신 시할머니께 절대적인 효자가 아니었지만 아버님의 두 아들들은 자나 깨나 어머니 생각뿐이다. 그러고 보면 보고 배운다는 것도 거짓말 같다. 그 부분은 나의 신경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남편의 한 모습이라고 인정해보기도 한다. 우리 네 식구가 외식을 하거나 나들이를 가도 남편의 말 끝자락엔 어머니도 모시고 갈까?라는 말이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분은 나의 시어머니일 뿐 내 가족은 지금 여기 모여사는 우리 네 식구뿐이라고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데 남편은 불쑥 그분을 가족의 자리라고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결혼하고서 딸이 없는 어머니께 잘해드리고자 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나의 아랫동서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나보다 사근사근한 동서는 여전히 “네 어머니.”하면서 어머니의 비위를 잘 맞춰드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잘해 드리면 어머니도 나를 딸처럼 좋아해 주실 거라 생각했던 것이 큰 화근이었고 억측이었다. 남들에게 이쁜 며느리로 보이고 싶어서 잘해드리고 싶었다. 전업주부였기 때문에 나를 최우선으로 두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나를 우선으로 두는 삶은 남들이 볼 때 남편 등골이나 빼먹는다는 인식을 의식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보다는 남편, 아이, 시부모님을 우선으로 두는 것이 전업주부로서의 최선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친정부모님부터 그런 생각을 심어주었고 삶에 여유가 없던 나는 그것이 맞는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런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독서를 시작하면서부터다. 남의 삶을 들여다보니 더 구구절절한 것도 보였고 어머니처럼 고상한 척하며 살기 싫어졌다. 내 앞에서는 언제나 좋은 시어머니처럼 행동하시지만 뒤돌아서서 내 딸과 남편에게 내 험담을 마구 쏟아내는 어머니였다. 한국에서 아이만 키우는 전업주부는 맘충이라는 말을 들어도 받아내야만 하고 시댁에서 키우는 강아지보다 서열이 아래다. 다 감내해야만 한다는 시선이다. 독서를 통해 그 부조리함을 알아갔던 것 같다. 아이만 키우는 것만으로는 힘을 키울 수 없다는 것,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이런 어머니와 선을 긋기 시작하면서 일을 시작했다. 20년 가까이 집에서 아이만 키우던 사람이 밖에서 할 일은 거의 없다. 심한 육체노동 일이 아니면 진입장벽이 낮은 일들 뿐이었다. 진입 장벽이 낮은 일들은 나를 존중해가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었다. 일을 시작했을 땐 처음 결혼했을 때의 나와 마찬가지로 나를 돌보지 못했다. 돈 보다도 일하는 엄마, 며느리는 어떠한 건지 겪어보고 싶었다. 일을 하고 1년간은 거의 매일 코피를 쏟았다. 지쳐 쓰러지기 일쑤고 늘 멍한 상태였다.      



일을 시작해도 남편에게는 껌값 같은 돈을 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내 앞에서는 무시 어린 말투이지만 내가 하지 못하는 집안일을 도맡아 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아이의 등교나 등원은 남편이 도맡았다. 아침은 거의 챙겨 먹이지도 않고 헝클어진 머리로, 겨울 티셔츠에 여름 치마로 유치원에 등원시켰다. 준비물을 빠뜨리기 일쑤여서 뒤늦게 유치원에 뛰어가는 아빠였다. 본인도 처음 하는 일이었을 거고 힘들었을게다. 하지만 껌값밖에 벌지 못한다고 일을 그만두라는 말은 없었다. 말로서 날 존중하는 건 아니지만 일이 그리 해보고 싶다면 해보라는 무언의 외조 같은 거다.      



일을 시작하고서 시아버님의 죽음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우울증을 겪는 어머니도 보았다. 얼마 전엔 신천지 교육장에서 교육받고 있는 어머니도 뵈었다. 매일 아침저녁 전화 통화하는 아들 둘은 어머니가 신천지에 다니시는 걸 꿈에도 몰랐었다. 순전히 내 직감으로 알게 된 것들이다. 시아버님 첫제사가 오기 전까지는 어머닌 매번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다. 매번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떠 안겨져 있었다. 아이들 일이 진정되면 어머니 일들이 터지고 직장일들로 시궁창으로 빠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는 새 난 어린 고양이에서 호랑이로 성숙되어갔다.



이제  나 스스로 꼴리는 대로 살고 있다. 인생에 그런 시기가 한 번은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그늘을 벗어나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님의 부재로 나는 일을 하면서 시작된 듯하다. 가족들과 함께 살아도 온전히 자신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남편이 잘되는 것이 아이가 잘되는 것이 내가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 내 향기를 먼저 품어야 한다.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기만 해서는 태양을 훔칠 수가 없다. 사는 방법은 제각각이지만 진리는 하나로 관통하더라.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처럼 TV에 나오는 스타가 아니더라도 글로서 영상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린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 요리를 잘하는 사람, 아이를 잘 키우는 사람, 일을 잘하는 사람, 재태크를 잘하는 사람.... 자신이 담고 있는 경험과 노하우들로 그들을 빛나게 한다. 제각각의 다른 경험이지만 어찌보면 하나의 주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향기를 품은 것들은 몇천 년이 지나도 그 향기가 지속된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매한가지다.  스스로 빛나는 나임을 자처했을 때 향기로 지속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내 삶이 멋지지 않더라도 반짝일 수 있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 다짐한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옆에 있는 때 꼴리는 대로 살아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