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되면 생기는 일 05
여태 내 방에서 버려진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 방에 나 말고 적어도 두 명은 더 기생해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버렸는데도 여전히 이 방 안 가득, 끝의 끝까지 차 있는 것을 보면 맥시멀리스트로서의 삶의 종착지는 100평 단칸방이 아닐 수가 없음을 오늘도 여지없이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소소한 이평 남짓의 방(정확히는 모르지만, 내 마음이 그 정도라고 한다)에서 나도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려면 정도껏 주기적으로 끝의 끝의 끝 정도는 버려줘야만 한다. 차근차근, 내가 모은 쓰레기들, 한때는 영원의 마음으로 주어 모으던 것들을 말이다.
내가 버리는 것에 진심이 된 것은 2019년 퇴사 즈음으로 흘러간다. 아무 계획도 없이 호기롭게 회사를 박차고 나온 나는, 꽤 긴 방황의 시간을 거쳐 어쩌다가 어느날 어느 순간 홈워커가 되었는데, 일하는 공간과 집이라는 공간의 중첩이 서서히 쌓이게 되자 견딜 수 없는 나머지 치우기 시작하게 된다. 왜 이 생각을 하는데 오싹해지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게 2020년의 팬데믹 상황은 그 견딜 수 없음을 가속화시켰고 나를 하릴없이 주기적으로 치우는 것을 일상 삼게 되었다. 주기가 우연하게 나의 서른과 맞아떨어졌으니, 과감하게 기회 삼아 주제에 끼어 이야기를 더 이어보자면.
버리는 것은 내 삼과 삶의 오답표 같은 것들이다. 너 이건 진짜 실패다. 이건 잘했네. 그렇게 O와 X를 번갈아가면서 표시하면 자연스럽게, 아니 사실은 꽤나 큰돈을 들여 나라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 계속 좋아할만한 것들의 리스트를 얻게 된다. 그러니 이 오답 리스트를 내 눈으로 확인하려면, 사야하는 것, 그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분명한 선행 과제로 주어진다.
내가 가장 큰돈 들여 구입한 노트북은 당연하게도 몇 년 동안 나의 방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니 이런 건 재투자의 가치가 있다. 얘가 나한테 벌어다 준 게 자기 몸값의 몇 배는 했으니까, 새 노트북을 다시 탐내는 것도 이치에 맞는다.
서랍장 하나를 뒤집어엎은 듯 나온 버리는 옷들은, 사이즈가 줄고 늘었던, 주머니 사정이 여이치 않던 이십대 중후반 시절 확신의 대변자다. 지금도 주머니 사정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년에 다시 꺼내입기 민망한 옷을 사 또다시 버리는 것보다, 마감 잘 된 옷들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걸 한 무더기 씩을 버려가면서 익히는 중이다.
서랍 가장 아래에 뭉터기로 있던 연필 꾸러미는, 여행 다니는 곳곳에서 하나하나 사 모은 것들이었다. 그걸 사자고 마음먹었던 이십대 중반의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너는 좋은 선택을 했고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하며 네 뜻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어두컴컴한 밑바닥에서 빛 보는 데로 꺼내 주었다. 내가 이방인이었던 곳들의 친밀한 흔적을 왕왕 들여다보려고. 다시 여행을 꿈꾸려고.
책상의 위치를 재배치하며 뒤로 간 책장에는 내가 꾸준히 좋아한 아티스트의 앨범이 빼곡히 꽂혀있다. 나의 열정이 다른 옷을 빌려 전시된 걸, 나는 꽤 만족스럽게 등에 진다.
여기에서 크게 언급되지 않은 것들, 그러니까 내 돈 주고 장만한 것들 중 리스트 상위에 오르지 못한 것들을 다시는 안 살 리는, 없다. 또 사겠지. 그리고 버리겠지. 가볍기 그지없는 영원의 마음으로. 어머, 이건 꼭 사야 돼. 모든 것에 설레는 수줍은 마음으로.
그리 사모으며 나는 '버리면서 얻는 과정'을 좋아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내가 생태계를 망치는 주범임을 확신하는 과정이기에, 소비하지 않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경종을 딸랑, 울리기도 하는 교훈적 행위에 닿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내가 오늘의 나이기까지 내가 선택한 낯낯들을 파헤치고 폐기하는 건, 어느 순간은 해야 할 일들임을 확신한다. 버려야만 남는 것들로 오늘의 나를, 서른의 나를 비추어 보게 된다. 몇몇 가지가 나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나를 어디에 데려다 놓았는지, 나에게 어떤 만남을 주었는지. 나는 다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그 물음표들에 자그마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는 이제 크라임신을 방불케 하는 나의 공간에서 힌트 1을 획득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온 것이다, 무엇이 기다릴지 아직은 잘 모르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