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기 전에 스코틀랜드를 갈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이번 학기를 공식적으로 마치기 전에 남은 최후의 일정. 2년마다 열리는 유럽 인구 학회 (European Population Conference) 참석. 유럽 인구 학회는 역시 2년 임기인 학회장이 재직하는 나라에서 열리는 관습이 있는데, 이번 학회를 끝으로 임기를 마친 Hill Kulu 교수는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류스의 교수이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 학회가 열리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영국을 작년에 비로소 처음 가본 나에게 스코틀랜드는 미지의 땅이었다. 이번 출장을 통해서 스코틀랜드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는데, 지루한 학회 참석 이야기는 최대한 축소하고, 4박 5일 동안 보고 들은 이야기를 두 편 정도로 나누어 적고자 한다. 지난번 런던 여행기의 제목을 따라가서 이번 여행기도 담백하게 '에든버러 여행기'로 이름을 정했다.
첫 번째로 놀랐던 점은 영국의 수도이자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보다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가 스톡홀름에서 가깝다는 것이다. SAS 항공사에서 운행하는 직항이 있는데, 연착이 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런던보다 20분 정도 빨리 에든버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 역시 매우 편리했다. 나와 일행은 트램을 타고 시내로 이동했는데, 왕복이 9.5 파운드로 그렇게 비싼 가격이 아니었고, 공항역에서 출발해서 35분 정도면 내가 묵었던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가 국립 갤러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런던에서 이렇게 목이 좋은 곳까지 가려면 엘리자베스 라인을 타든,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든 역시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체감 난이도는 에든버러 쪽이 훨씬 간편하다고 느껴졌다. 한국 여권 소지자는 자동 출입국 심사가 되는 것은 덤.
첫 번째 날 두 번째로 놀란 것은 만만치 않은 에든버러의 물가였다. 필자가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고, 스톡홀름은 결코 '싼 동네'가 아니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에든버러 물가는 심하게 비쌌다. 런던보다 더 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첫날 먹었던 피시 앤 칩스와 진저비어의 가격은 20파운드를 웃돌았고, 숙소 근처에서 장을 볼 때에도 런던보다 물가가 싸다는 느낌은 딱히 받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를 보면 물가가 이 정도로 비쌀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높을지 여행 내내 고민한 결과, 이곳이 스코틀랜드의 수도임과 동시에 상당한 매력을 지닌 관광도시라는 점이 한몫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숙소 가격이 학회 바로 전에 있었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공연 때문에 이미 천정부지로 치솟은 탓에 숙소 가격만으로는 물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시사철 숙소가 저렴하지 않은 런던처럼, 에든버러의 괜찮은 숙소는 사시사철 꽤 비싼 가격일 것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처럼 에든버러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은 일부러 비수기 주말여행을 노려서 여행을 좀 더 알뜰하게 갈 수 있겠으나, 한국에서 영국을 놀러 온 김에 에든버러 구경을 간다고 생각하면, 아마 성수기를 피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세 번째로 느껴진 것은 이곳 역시 꽤나 다문화 다인종 사회라는 점이었다. 스톡홀름과 비교해 보자면 도시 중심부의 풍경이 확실히 다르다. 동아시아인 들도 확실히 더 눈에 많이 띄고, 아프리카, 남아시아, 중동계로 보이는 사람들도, 아마 런던만큼은 아닌 것 같지만,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영어로 소통하지 않은 관광객도 있고, 짙은 스코틀랜드 악센트를 구사하는 현지인도 있었다. 내가 슬쩍 스며들기 좋은 분위기라는 것을 직감하고, 언어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환경임을 감지하자 나의 긴장감은 극도로 낮아졌다. 행색이 꽤 남루한 덕분인지 지금까지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해본 적이 없는데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조심할 것은 다 조심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의 4박 5일도 아무런 불쾌한 일 없이 아주 조용하게 지나갔다. 심지어 스코틀랜드가 유로 2024 개막전에서 독일에게 대패하는 참사가 발생한 그날 늦은 밤에도.
본격적인 학회가 시작되기 전날 슬쩍 둘러본 에든버러 대학교는 영국의 오래된 대학교의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서 상으로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가 더 먼저 지어졌고, 에든버러 대학교는 스코틀랜드에서 두 번째로 16세기 후반에 지어진 대학교이니, 내가 석사 공부를 했던 룬드 대학교보다 약 80년 정도 앞서 지어진 곳인데, 눈으로 보기에는 몇 세기는 더 먼저 지어진 느낌이었다. 룬드 대학교의 랜드마크는 흰 건물이라서 오래되었어도 깨끗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는데 비해, 에든버러 대학교의 올드 캠퍼스는 세월의 흔적처럼 검게 변한 석조 건물이라서 더 예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캠퍼스를 확장하면서 현대에 새로 지은 건물들도 볼 수 있었다. 사실 콘퍼런스 일정이 진행된 장소는 대부분 이렇게 새로 지은 건물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스코틀랜드 깃발의 존재감이었다. 영국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연합 왕국 (United Kingdom)이라는 것과 스코틀랜드가 분리 독립 주민 투표를 시도할 만큼 지역색이 뚜렷한 곳이라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서 접했지만, 얼마나 주민들이 스코틀랜드 정체성에 진심인지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할 것 같다. 우연히 스코틀랜드가 영국을 구성하는 지역 중 하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스코틀랜드의 모습을 구경시켜 준 다음, 스코틀랜드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면, 영어를 사용하지만 다른 나라인 아일랜드처럼, 완전히 다른 나라로 간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그동안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은 과언이 아니었고, 다행히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English"라고 부르는 것 자체로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말 역시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RP나 잉글랜드 악센트에 꽤 익숙한 내 귀도 스코틀랜드 악센트를 알아듣는 데에는 꽤 긴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영어가 제1 언어가 아니기 때문인지 나의 영어 악센트는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동화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스코틀랜드 악센트에 동화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만큼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놀랍게도 스코틀랜드에서는 먹고 마시는 이야기도 좀 쌓였다. 런던이 아닌 이곳에서 처음으로 영국 전통 요리라고 손꼽히는 피시 앤 칩스를 먹은 이야기, 스코틀랜드에서 1901년부터 제조했다는 "Irn Bru"라는 탄산음료를 우연히 접하고 매력에 흠뻑 빠져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5병을 쟁여 온 이야기, 그리고 대부분 한국 사람이 의외로 큰 거부감 없이 접할 수 있다는 해기스 이야기 등은 다음 글에서 마저 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