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지원 연대기: 들어가며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by 김우성

2018년 8월, 한국을 떠나기 전


예전부터 지인들이 제 진로 계획을 물어보면, 스웨덴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에는 박사 과정까지는 공부하고 싶다고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스웨덴에서 석사를 시작했으니 이왕이면 여기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습니다. 석사 1년 차 과정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2학년이 되면서 점점 진로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해야 함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제가 공부를 계속해야 좋은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일단은 박사과정 공부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제가 현재 공부하는 룬드대학교에서 박사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 아무리 뛰어난 지원자도 합격하지 못할 수 있다


한국과 스웨덴의 박사 과정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한국인이 한국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하는 것과, 스웨덴에서 비 유럽연합 국가 시민으로서 공부를 하는 것이 의미하는 차이는 상당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자면, 스웨덴 박사과정 학생은 박사 학위 논문 지도를 받아야 하는 학생인 동시에 학교에 고용되어서 월급을 받고, 돈 받은 만큼 연구 성과를 내는데 기여하는 노동자라는 점입니다. 제가 모든 포지션을 확인해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규칙이 예외 없이 적용된다고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보거나 지원한 모든 포지션은 박사 과정 공고를 낼 때부터 "고용 조건"에 대해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등록금을 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비 유학(self-funding)을 하는 경우도 제가 본 공고 중에는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교직원이 되면서 월급도 받고 학위 과정도 공부할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박사 과정 공고의 숫자는 관심 분야가 얼마나 연구 펀딩을 잘 끌어왔는지에 상당히 좌우됩니다. 박사 한 명을 길러내기 위해서 학과가 상당한 규모의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과에 따라서 매해 펀딩 여부와 큰 상관없이 일정 수의 공고를 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학과에서 직접 해당 박사과정 학생을 고용하고, 월급을 주는 공고를 냅니다). 하지만 저처럼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가 석사 과정에서부터 이미 많이 좁혀져 있다면, 본인의 관심사와 맞춤 맞는 자리는 매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지원 분야를 넓혀야 합니다. 예컨대, 인구학으로 나름 분야를 좁힌 제가 다시 Economics나 Sociology 박사를 지원하고, 해당 학과에서 제 연구 문제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죠. 이런 시스템 때문에 지원자가 운이 없다면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원하는 대학에서 박사를 시작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열린 자리가 없으면 지원이 불가능하니까요. 혹시 스웨덴에서 석사에 이어 박사 공부까지 염두에 두시는 분이라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이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분을 찾아가서 전반적인 학과의 펀딩 상황이나 앞으로 프로젝트 '수급' 전망을 미리 알아보시는 방향을 추천해 드립니다.


박사 과정 연대기 1.PNG 이 모든 상황의 근인: 경제 인구학 연구소는 박사 과정 자리를 스스로 낼 수 없다. 출처: 본인


불안함의 시작, 2019년 4월


유학 초기부터 박사 과정에 아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런 시스템에 대해 2018년도부터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 문제가 피부로 확 와닿은 계기는 2019년 4월에 룬드 경제사학부에서 박사 과정 오프닝을 설명하는 간단한 세미나를 열었을 때였습니다. 인구학과 관련된 공고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저는 제가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2019-2020 academic year에 인구학 과정 코디네이터를 맡을 A 선생님에게 제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 차례 연락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이해한 바가 맞았습니다. Centre for Economic Demography 소속 연구자가 박사과정 학생을 새로 고용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따 오지 못했고, 그래서 2019년 4월에 어떤 공고도 내지 못한 것입니다. 2019년 연말에 발표되는 프로젝트에 여러 연구자가 지원했기 때문에 2020년 상황은 낙관할 수 있지만, 연말에 다시 자기에게 물어보라는 설명도 남겼습니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여름을 보내고, 정신없는 피리어드 1을 보내고 어느새 두 번째 논문 주제를 고르는 11월이 다가왔습니다.


탈출 계획이 필요하다, 2019년 11월


그렇게 논문에 사용할 데이터에 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다시 방문한 A의 연구실. 저는 슬쩍 프로젝트 펀딩 성공 여부를 물었습니다. 인구학 과정 동기 중 박사 진학에 관심 있는 학생이 저밖에 없기 때문에, 입소문으로 들은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지원한 프로젝트는 대부분 경과가 좋지 않았고, 이대로 가다가는 2020년에도 공고를 못 낼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포닥 선생님이 자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어차피 이 문제는 교수가 결정하는 문제라서 주니어 리서처들에게는 큰 권한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A는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룬드에서 자리가 나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같은 대학의 다른 포지션이나, 다른 대학을 부지런히 알아보라고 귀띔해 주었죠. 한국에서는 나름 경쟁 관계에 있는 학교로 박사 진학을 권하는 경우가 흔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A 선생님이 거리낌 없이 여기저기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웃는 얼굴로 면담이 끝났지만 사실 며칠 동안 허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계속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컸고, 일부러 학과에서 들으라는 코스웍도 모두 이수하면서 이상적인 지원자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는데 이제는 열심히 탈출 계획을 짜야하는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배수진을 치는 마음으로 떼는 발걸음, 2019년 12월


하지만 속상해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대신 겨울에 한국에서 잠깐 쉴까 하는 생각은 확실하게 접고, 겨울 방학은 좋은 2학년 논문 주제를 잡고, 이번 학기 코스웍에서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박사 과정 지원 서류를 차근차근 준비하는데 활용해야겠다는 나름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스웨덴도 이른바 "자교생"이 박사 과정 지원하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그 이유는 셀 수 없이 많고,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논의할 가치가 충분히 있겠습니다. 결론은 더 독하게 입시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12월 초부터 다른 대학의 대학원 프로그램 담당자나 박사과정을 총괄하는 교수진에게 메일을 보내고, 온갖 매체를 통해서 박사 과정 공고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합니다. 룬드에서도 Economics나 Sociology 박사 과정이 예상한 대로 나왔음을 확인했고요. 이렇게 박사 과정 지원 여정이 시작됩니다.


박사 과정 연대기는 제가 어떻게 마지막 학기를 보냈는지 스스로에게 남기는 기록임과 동시에,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어권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소한 유럽 여러 대학/연구소로 박사 과정을 지원하는 예상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드리고자 시작했습니다. 모든 내용이 반드시 시간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되돌아보면 먼저 신경 쓰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는 것들이 있고, 그런 내용들을 먼저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여정에서 다시 한번 느낀 바이지만, 유럽에서 박사 과정 이상을 공부하시는 한국인의 수는 석사 과정 학생보다 훨씬 적습니다. 때문에, 일반화시키는 데에 명확한 한계가 존재할지라도, 제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미래 지원자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진: 2019년 12월 7일 노벨 생리의학상 기념 강연을 들었던 카롤링스카 연구소의 Aula Medica,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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