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지원 연대기 1: 추천서

내게 '되는' 추천서를 주세요

by 김우성

영화 <인셉션>에서 임스로 분한 톰 하디는 문서 위조의 대가입니다. 그는 중요한 정보를 빼가기 위해서 추천서를 위조하는 그의 기술을 멋지게 발휘하고, 결국 주인공들은 이 위조된 레퍼런스를 이용해서 원하는 정보를 얻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본격적으로 이력서를 내 본 적이 없고, 대학 입시도 자기소개서만 잘 쓰면 교장선생님 추천서는 기계적으로 발급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왜 추천서에 목숨을 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석사 과정에서도 저는 추천서가 필요 없는 전형으로만 세 번 입시를 했기 때문에 (왜 세 번인지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더욱 자세하게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제가 다니는 룬드대학교 경제사학부는 제가 두 번째로 입학한 대학원이고, 세 번째로 합격한 대학원입니다) 추천서를 받는 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지, 혹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실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박사 과정 준비를 하면서 저에게 가장 낯선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추천서를 받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추천서 받기가 연대기 맨 앞에 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추천서를 잘 받기 위해서는 석사 과정을 시작할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계획이 다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추천서를 받자고 석사 과정에서 연구자들과 맺는 관계를 철저히 계산적으로 가져가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석사 입학할 시점부터 본인이 박사 진학을 할 확률이 꽤 높다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내 추천서는 누가 써 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항상 머릿속 한편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추천서에 얽힌 이야기를 가볍게 해 볼까 합니다.


실마리 1: 누가 내 추천서를 써줄 것인가?


누구에게 추천서를 부탁해야 할까요? 석사 논문 지도교수는 (거의) 무조건 포함되어야 합니다. 지도교수만큼 수업 이외에 여러분을 자주 만난 연구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도교수가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학계에서의 네트워크와 경험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추천서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유용한 조언을 얻기도 합니다. 제가 공부하는 석사 과정은 1년 1 논문을 써야 하므로 저는 논문 지도교수가 두 명입니다. 그리고 두 명 모두 감사하게도 흔쾌히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추천서 두 장을 보내는 전형에서는 대부분 이 둘의 추천서를 보냈습니다. 타이틀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논문 지도교수는 둘 다 정교수입니다. 때문에 경력이 오래된 연구자이고, 제가 지원하려는 대부분의 학교와도 여러 방향으로 교류하고 있어서 소소한 팁을 얻어가기도 했습니다 (해당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특정 교수에 대한 이야기 등이죠).


하지만 추천인이 3명 이상 필요한 경우도 있고, 마감일을 앞두고 지도교수들이 바쁘거나, 해당 전형에 저를 추천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언제나 넉넉하게 추천서 풀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세 번째로 제가 부탁드린 사람은 2학년 내내 학생 생활 지도 전반을 책임지고, 본인은 이주/통합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포닥 선생님입니다. 이 분은 지난번 글에도 등장했던 분으로, 특정 학교를 지원할 때 기꺼이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분이기도 합니다. 네 번째로 부탁드린 분은 제가 두 개의 수업을 들었고, 두 수업 모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으며, 인구학 분야에서 자주 사용하는 분석법 쪽에 전문성을 가진 부교수(assosicate professor)입니다. 이 분 역시 기쁜 마음으로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습니다. 4장의 추천서를 확보했으니 아마 더 이상 추천서를 부탁드릴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추천서가 필요하다면 제가 이전에 다녔던 학부에서 알고 지냈던 교수님께 부탁드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룬드에서는 저에게 충분히 도와준 셈입니다.


실마리 2: 언제, 어떻게 부탁해야 하는가?


우선 직접 찾아가서 부탁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메일을 보내서 허락을 구했습니다. 이 방법이 더 나은 이유가 있습니다. 유럽 대부분의 대학에서 추천서를 받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제가 훨씬 자주 본 방식으로, 온라인으로 지원 서류를 꾸밀 때, 추천인의 이메일 주소를 포함한 정보를 써넣고, 지원이 완료되면, 혹은 제가 지정하면 해당 학교/기관에서 자동으로 제가 연락처를 넘긴 추천인에게 추천서에 대한 안내를 보내줍니다. 때문에 사전에 협의만 되어있다면 제가 추천인에게 따로 공지할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학교 자체 양식, 혹은 자유 양식에 따라서 추천인이 직접 특정 링크 혹은 이메일에 추천서를 제출해야 하고, 제가 직접 추천서가 필요함을 알려야 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 추천서를 보내는 과정 자체를 추천인이 알아서 해야 하기 때문에 학생의 역할은 추천서 보내는 일정과 추천서 양식 정도를 메일로 알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미리 추천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지원을 여러 번 할 것이므로 여러 번 요청이 갈 것이라는 점을 알린다면, 오피스로 일일이 찾아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추천인을 만나려면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추천서 일 때문에 만나고자 한다고 하면 요청을 수락할 것인지 답장으로 바로 알려줄 것이 뻔합니다. 즉 "뵙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메일을 보낼 때 평소보다 조금 더 격식을 갖추고 톤을 다듬어서 추천서를 부탁하는 것이 낫습니다.


시기는 당연히 원서 마감 전이어야 합니다. 처음에 추천인이 되어 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과정은 확신이 선 다음이라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추천서를 쓰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원서 마감 기한을 며칠 남기고 서류를 부탁하는 도박은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기도 하고, 본인에게도 좋은 선택입니다 (사실 저도 마지막까지 지원을 고민하다가 이런 실수를 이미 저질렀습니다. 추천인들이 부지런한 분들이라서 무사히 넘기기는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학별 지원 일정을 어느 정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대학이 원서 마감 기한과 추천서 마감 기한을 다르게 두고, 추천인들에게 조금의 시간 여유를 주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원서 마감 전에 우선 연락처만 서류에 넘긴 다음에 느긋하게 추천인들이 자기 일을 마무리해 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겠습니다.


박사 과정 연대기 2.PNG 자체 추천서 양식이을 가지고 있는 대학교도 있습니다. 출처: 스톡홀름 대학교 PhD in Economics 공고 첨부 서류


실마리 3: 학생이 추천서 내용에 관여하는가?


한국 대학원생 사이에 괴담처럼 떠도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에 가까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추천인이 직접 추천서를 쓰지 않고 학생에게 초안을 써오게 한다든지, 내용을 대강 만들게 한 뒤, 이를 바탕으로 본인이 마무리한다는 것입니다. 실명을 공개할 수 없지만 저 역시 이런 경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무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시스템은 어떨까요? 불가능하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절대로 학생이 초안을 쓰거나, 내용을 조회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부탁한 추천서가 10장을 훨씬 넘었지만, 저는 제 추천서에 어떤 내용이 적혔는지 전혀 모릅니다. 다만 서류를 통과한 전형이 있는 것을 보니 "이 학생을 절대 뽑지 마시오"라고 쓰지 않았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추천인은 학생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는 이유로 자기가 추천서를 써줄 학생의 CV, SOP 요약본과 성적표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때 CV와 SOP를 신경 써서 다듬는다면, 자기 추천서에 들어갈 내용을 어느 정도는 '추천'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물론 이렇게 신경을 써 주는 추천인은 더 꼼꼼하게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두 배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저에게도 네 명 중 한 명의 추천인이 이런 요구를 했고, 기쁜 마음으로 제 아카데믹 CV와 논문 초록, 간략하게 줄인 SOP를 보냈습니다.


실마리 4: 추천서를 부탁할 때 플러스알파


추천서를 부탁할 때, 간접적으로 좋은 기회가 있으면 추천을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전할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 필요한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 "Also, advice and suggestions on the best way to PhD position search would be more than appreciated."라는 표현을 덧붙였고, 덕분에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공고이기는 했지만 두 건의 공고 지원을 권유받았고, 어떤 분은 당장은 조언해 줄 내용이 없지만 흥미로운 공고가 뜨면 포워딩해 주겠다는 답장을 했습니다. 이런 부탁은 밑져야 본전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운을 띄우는 작업은 자신이 관심 있는 공고에 대한 의견을 앞으로 구해보겠다는 암시가 되기도 합니다. 현재 한 대학에 비슷한 내용으로 두 개의 포지션이 나와서 어떤 포지션에 지원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 저도 곧 조언을 구해볼 예정입니다. 해당 대학 내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경력 있는 연구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듣는 정도에 그칠지라도, 이미 박사과정을 마치고,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주도해 본 경험자들은 아무래도 보는 안목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분야는 좁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4가지 실마리는 최소한 유럽에서 사회과학(경제학 포함) 분야 박사 지원을 고려하시는 분이라면 어느 정도는 도움을 받으실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정이 모두 같지 않더라도, 제가 시행착오를 겪은 과정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에도 박사 지원 처음에 고려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박사 과정 연대기는 제가 어떻게 마지막 학기를 보냈는지 스스로에게 남기는 기록임과 동시에,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어권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소한 유럽 여러 대학/연구소로 박사 과정을 지원하는 예상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드리고자 시작했습니다. 모든 내용이 반드시 시간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되돌아보면 먼저 신경 쓰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는 것들이 있고, 그런 내용들을 먼저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여정에서 다시 한번 느낀 바이지만, 유럽에서 박사 과정 이상을 공부하시는 한국인의 수는 석사 과정 학생보다 훨씬 적습니다. 때문에, 일반화시키는 데에 명확한 한계가 존재할지라도, 제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미래 지원자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진 출처: 2019년에 찍은 베를린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본인. 아무 맥락이 없습니다. 한 번 사는 우리네 인생에는 자주 개연성을 찾기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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