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4년을 팔아보세요
지난 시간에는 아카데믹 CV를 준비할 때 고려해야 할 내용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이번 글은 연구계획서, 보통 research proposal 혹은 thesis project proposal이라고 부르는 서류 작성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준비할 서류 난이도로만 보면, 이 서류가 가장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른 서류와 달리 대부분의 석사과정 코스에서 연구계획서는 정규 수업 과정에서 다루기 때문에 어려운 만큼 도움받거나 익숙해질 기회가 더 많습니다. 석사 논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프로포절 쓰기에 대해서 어떤 경로로든 배우기 마련이고, 룬드 경제사학부나 경제학부처럼 1년 1 논문을 써야 하는 환경에서는 입학한 지 6개월이 되지 않아서 3000 워드 분량의 제대로 된 프로포절 쓰기가 과제로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사 논문 프로포절 쓰듯이 쓰면 된다"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역시 제 경험과, 주변에 제 분야, 혹은 연관 분야에서 프로포절을 준비하던 친구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몇 가지 유의사항을 써보려고 합니다.
0. 공공연한 비밀
여러분의 학위 논문은 꼭 프로포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박사 학위 논문은 단일한 하나의 글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며, 4개 정도의 투고가 가능한 혹은 이미 투고된 논문 모음이라고 가정할 때, 여러분의 단독 연구만 포함하는 것도 아니며, 특히 북유럽 문화에서는 여러분이 속한 연구팀의 관심사와 여러분의 학위 논문 프로젝트가 같이 흘러가기 때문에 여러분의 프로포절과 학위 논문이 100%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포절을 받는 이유는, 해당 주제에 대한 여러분의 배경지식, 이해 정도, 연구를 계획할 수 있는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위 논문 그 자체의 청사진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학위 논문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잠재력의 청사진을 가지고 남과 경쟁한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뇌피셜"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프로포절 주제 고르기가 신경 쓰인다고 하자 지도교수가 던진 첫마디는 "주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하다"였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전혀 모르는 주제를 가지고 프로포절을 쓰신다면 배경지식의 부족과, 연구 방법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단점을 보완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데이터를 사용하겠다고 한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혹은 "이러이러한 입장을 가진 논문을 선행 연구 개관에 포함한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와 같은 사소한 부분에서 지나치게 염려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1. 멘토 구하기
혹시 조언을 구할 사람 없이 외롭게 박사 과정을 준비하고 계시다면, 감히 잘못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미 이 모든 과정을 끝낸 것은 물론, 피 튀기는 박사 후 과정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선배 연구자의 조언은 프로포절 작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여러분이 쓰는 프로포절은 여러분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결과물이겠지만, 위에서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어떻게 이 아이디어를 잘 담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상의할 전문가가 옆에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도움은 여러분이 진학하고자 하는 학교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지도교수, 혹은 지도 교수 그룹의 일원과 상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전 글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미리 공지하거나, 아예 금지하는 학교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여러분이 공부하고 계신 학교에서 조언자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논문 지도교수, 혹은 논문 지도교수가 추천해주는 연구자가 아마도 가장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조언자가 되겠지만,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에게 연락을 취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수줍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만사가 귀찮은 타입만 아니라면, 공부를 더 해보겠다고 도움을 구하는 석사과정생을 대부분 무시하지 않습니다.
2. 분량과 현실의 균형 찾기
여러 대학을 지원하시다 보면 느끼시겠지만, 어떤 전형은 프로포절을 받지 않기도 하고, 500 워드, 1000 워드, 2000 워드 등 서로 다른 분량의 글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주제로 여러 대학에 지원하더라도 분량에 따라서 담거나 덜어내야 할 내용이 모두 다릅니다. 경험상 1000 워드가 가장 쓰기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500 워드의 경우 정말 핵심 내용만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관련 선행 연구를 엄청 열심히 찾아보거나, 방법론에 대해 매우 깊이 설명할 틈이 없습니다.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고, 아주 대략적인 계획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한 장이 가득 찹니다. 2000 워드를 넘어갈 경우 여러분이 하고 싶으신 이야기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00 워드의 경우 어느 정도의 깊이가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압축적인 글쓰기를 요구합니다. 짧은 분량에서 여러분의 배경 지식을 조금 더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은, 지원하고자 하는 대학과 상의한 뒤, 허용된다면 reference가 아니라 bibliography를 추가해서 본문에서 모든 주요 선행연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해당 연구가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 역시 여기저기에서 조언을 구하다가 한 박사 후 과정 연구자가 저에게 조언해준 내용인데, 일견 합리적인 방법 같습니다. 대부분의 입학 전형에서 reference와 biblography는 분량에 포함되지 않으니까요.
3. 그래서 어떤 내용을?
들어가야 할 내용은 분야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널리 받아들여지는 기준이 있습니다. 여러 대학에서 자기 대학이 선호하는 연구계획서 스타일을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누구나 쉽게 참고할만한 내용을 담은 링크를 몇 개 공유하겠습니다. 내용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강조하는 내용이 서로 비슷합니다.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사회과학대학의 연구계획서 가이드라인
LSE Media & Communications 박사과정 가이드라인
링크에 나온 내용이 이미 훌륭한 내용이지만, 조금 덧붙이자면 여러분이 연구 대상이 되는 시간적, 공간적 범위 (scope)를 정하셨다면, 설정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물론, 선행 연구 리뷰 역시 일반적인 이론적 배경을 톺아본 다음에는 이 범위에 상응하는 내용으로 채우시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인구 정책의 특정 부분에 대한 학위 논문을 계획하고 있는데, 선행 연구에서 끊임없이 미국이나 유럽 선행 연구만 나온다면, 해당 연구가 연구 주제와는 관련성이 높다고 할지라도, 평가자 입장에서는 리뷰 부분이 부족하다고 느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역으로, 리뷰하기 너무 까다로운 주제를 학위 논문 프로포절로 밀고 나가면 어쩔 수 없는 현실적 벽 때문에 좋은 프로포절을 쓰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시면서 글을 다듬어나가셔야 하겠습니다.
4. 피드백 부탁하기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주변 동료, 혹은 여러분을 도와주는 조력자에게 초고 피드백을 부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학교에 있는 academic skills service 담당 선생님에게 부탁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다만 여러분 주변 동료/조력자와 후자는 서로 다른 관점으로 피드백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자는 여러분과 연구 관심사를 어느 정도 공유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내용적 측면에서, 후자는 좀 더 형식적 측면에서 조언을 해 줄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연구계획서는 "똑똑하지만 게으르고 해당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가 읽어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구 관심사가 다른 사람이라도 여러분에게 충분히 중요한 조언을 해줄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학과 수업과 박사 과정 지원을 병행하던 시기에 저는 피드백을 부탁할만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습니다. 제 글을 읽고 나중에 박사 과정에 지원하시는 독자 여러분은 이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마치며
5가지 내용으로 간단하게 프로포절 작성에서 고려하실 내용을 알아봤습니다. 아마도 가장 먼저 시작할 일은 좋은 주제를 찾는 것이고, 그와 거의 동시에 시작할 일은 조언자를 찾는 일입니다. 여러분에게만 좋은 주제는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이미 "면허"를 가지고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가 보기에도 좋은 주제가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때문에 주제 찾기에서 너무 어려움을 겪고 계시다면 영감을 얻는 차원에서는 조언자 찾기가 더 먼저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는 어떤 학술 글쓰기를 하더라도 통과하셔야 하는 지루하지만 중요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문적인 글이라도, 프로포절은 여러분의 가능성을 "파는" 글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혹은 미래의 독자 여러분께서 평가자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글을 쓰시고, 좋은 소식 들으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박사 과정 연대기는 제가 어떻게 마지막 학기를 보냈는지 스스로에게 남기는 기록임과 동시에,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어권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소한 유럽 여러 대학/연구소로 박사 과정을 지원하는 예상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드리고자 시작했습니다. 모든 내용이 반드시 시간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되돌아보면 먼저 신경 쓰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는 것들이 있고, 그런 내용들을 먼저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여정에서 다시 한번 느낀 바이지만, 유럽에서 박사 과정 이상을 공부하시는 한국인의 수는 석사 과정 학생보다 훨씬 적습니다. 때문에, 일반화시키는 데에 명확한 한계가 존재할지라도, 제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분이 할 일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진: 작년 제 생일에 먹은 케이크였습니다. 모두 케이크처럼 거부하기 힘든 연구계획서를 쓰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