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같은 장면을 그리고 있다.
토끼는 숲속을 걷고, 밤이 되어 별이 반짝인다.
별의 위치를 조금 바꾸고,
토끼의 표정을 미묘하게 고치고,
나무의 그림자를 몇 밀리미터 낮췄다.
이 장면이 완성되면
토끼는 드디어 모험을 떠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만 아직 못 떠나고 있다.
작업이 길어지면
그림책 속 세계에 내가 갇힌다.
매일 토끼만 보고, 매일 같은 장면을 반복하다 보면
진짜로 내가 그 숲속에 있는 것 같다.
문득 커피 마시러 갔을 때
주문하러 간 나를 점원이 부르는 게 아니라
“어, 토끼님이세요?”
하고 부를 것 같은 착각까지 했다.
아이를 위해 만든 이야기지만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건 작가 자신이다.
토끼가 넘어지면 내가 아프고,
토끼가 울면 내가 뭉클하다.
어느 날은 진짜로 토끼에게 물어봤다.
“너 계속 이 숲에서 돌아다녀도 괜찮겠니?
나처럼 좀 지치진 않았어?”
그러자 토끼는 대답도 없이
계속 앞으로 걸었다.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그렸으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처음엔 그냥 꿈에서 시작됐다고 하지.
근데 꿈은 때로 현실보다 진지하고,
더 논리적이고,
더 냉정하다.
그림책 속 동화는 가볍게 보여도
그 안에서 감정은 날 것 그대로다.
모든 장면이 진심이고,
모든 대사가 고백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그 안에 갇히게 된다.
아니, 갇히는 게 아니라… 일부러 들어가는 걸지도.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
토끼는 이제 절벽 앞에 서 있다.
나는 그 토끼에게 말해본다.
“조심해. 이번 장면 진짜 감정 센 거야.”
물론,
그 토끼는 아무 대답도 없고,
그림 속에서 여전히 똑같이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현실보다
그림책 속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동화에 숨고 있는 걸까? 아이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며 내가 나를 위로하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 동화가 끝나기 전까진
나도 여기에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