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누군가와 자꾸 비교하며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부족한 나를 누가 알까 봐 숨기기에 급급했을 뿐 아니라, 창피해하고 속상해했다.
때로는 내가 잘못하고 실수가 많아 부족하다고 느낀 적도 있지만 내 의도와 상관없이 가져야 했던 외모와 환경 등에서 오는 부족함으로 인해 상대적인 부족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어렸을 때는 내 생각과 다름에도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고 잘 듣는 척을 했던 적도 있다. 부모님의 삶이 힘들어 보여서 왠지 내 생각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았고 나만이라도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부모님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 것 같아 거절하지 못해 부모님 말씀은 가능하면 들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나는 착한 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그 말은 부모님에 대한 나의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키에 비해 통통한 몸매를 가진 나는 외모에 자신감이 없어 움츠리고 다녔던 것 같다. 아버지가 등 뒤에서 걸을 때면 내 어깨가 굽어 보인다며 '어깨 좀 펴고 다녀라'라고 하시며 내 어깨를 뒤로 젖혀주곤 하셨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인사를 건네어야 하는 상황에도 남들과 다른 치아를 가진 나는 내 치아를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워말을 아끼는 편이었고 꼭 필요한 말을 해야 할 때에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거나 말보다는 눈과 표정으로 말을 하는 편이었다. 덕분에 나는 차분하고 얌전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20대가 되었을 때 나에게도 생각이 있을 뿐 아니라 내 생각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라 표현하고 나면 오히려 관계가 더 힘들어졌던 적도 있었고 참았다가 표현을 하다 보니 격하게 표현할 때도 있었지만 내 생각이나 마음을 표현하고 나면 편안하고 마음이 시원한 감정을 경험하면서 자주 내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배우고 싶을 때 배우지 못한 나의 욕구는 어린 내 아이들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공부는 잘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며 모질게 대했었다. 특히 큰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가르치며 잘 깨우치지 못한다고 혼냈었다. 또한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잘하면 칭찬을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에게 칭찬을 한다는 것이 과하게 칭찬을 해서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했다.
둘째가 다섯 살 때 커다란 트럭에 치여 큰 사고를 당했을 때 치료를 하느라 장기간 병원생활을 하면서 네 식구가 모두 고생을 했다. 이때 네 식구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고 한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머리로는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건강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아이들은 특별하다는 생각에 아이들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똑똑한 아이보다 행복한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안학교를 보냈었다. 공부보다는 인성과 체험위주의 수업을 하는 학교에 보냈는데 내 의도와 상관없이 큰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이 더 힘들었다는 말을 하고 둘째는 고등학교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내 생각이 아닌 아이들의 생각을 듣고 함께 조율해가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늦은 나이에 대학 공부를 하느라 힘들었던 나는 두 아들이 비슷한 시기에 모두 사립대학교를 다녀서 많은 등록금이 부담되었지만 아이들이 대학 졸업 후에 학자금 대출로 인해 힘들지 않게 하려는 엄마의 마음이 있었다. 그때의 내가 했던 생각과 행동이 옳은 것이었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나는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고 졸업을 시키는 것이 목표였기에 두 아이의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했고 그것을 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