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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둥맘 Aug 08. 2020

책에 책잡히다

"누나, 책 읽어줘!"

어릴 때 글을 모르던 동생은 나에게 매일 졸라댔다. 어떤 때는 귀찮아서 책의 내용을 내 맘대로 줄여서 대충 읽어주기도 했다. 그러면 동생이 금방 알아차리고는 다시 읽어달라고 했다.


동화 명작 전집이 집에 널려 있었다. 수십 권의 책이었는데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누런 종이 위에 빽빽이 적혀있고 딱딱한 겉표지는 비닐로 잘 포장된 고급 양장의 전집이었다. 나중에 아빠가 설명해주시는 바로는 사업에 실패한 친구가 다리를 절면서 책을 팔러 와서 전집 한 질을 사준 거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은 나의 장난감이었고 친구였다. 다른 친구들은 바깥에 나가서 뛰어놀 때도 나는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읽었던 책의 내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라비안 나이트였다. 주인공인 알리바바와 함께 나는 마법 융탄자를 타고 온세계를 날아다녔다. 가끔가다 101인의 도적떼도 만났고 지니가 살고 있는 신기한 요술램프의 마법에 홀리기도 했다. 


겨울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하는 독서캠프에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난다. 장작 난로를 뜨끈하게 피워놓은 교실에서 수수께끼 책을 낄낄대면서 읽거나 무서운 귀신 이야기가 나오는 전래동화를 일부러 골라서 읽으면서 마음을 졸였던 기억도 난다. 어둑어둑한 밤에 혼자 있거나 화장실을 갈 때는 꼭 뒤에서 귀신이 쫒아오는 것 같아 무서움에 떨기도 했다. 그래도 귀신 이야기 책이 주는 쫄깃거리는 긴장감을 포기할 순 없었다.


조금 커서는 아빠 서재에 있는 세계명작 전집을 몰래 빼서 읽곤 했다. 대부분 톨스토이와 같은 유럽 작가들의 책이었다. 열 글자 가까이 되는 주인공의 외국어 이름과 낯선 외국의 생활 풍습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냥 무작정 읽었다. 주로 남녀가 사랑에 빠지거나 불륜에 빠지는 내용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멋지고 예쁜 주인공을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폈고, 무도회에서 벌이는 귀족들의 피로연에 황홀했다. 우연히 티브에서 방영해주는 세계명화에서 나오는 멋진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를 벌이는 장면과 책의 내용이 오버랩되면서 묘한 설렘을 느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학교 권장도서에 나오는 한국명작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이상, 김유정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어두운 일제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이었다. 중학생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혜석과 같은 여류작가들의 글도 많이 읽은 기억이 난다.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국 남성들의 무지몽매한 행실에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는 유안진, 김남조와 같은 분들의 수필집이 한창 유행이었다. 소녀감성을 촉촉이 적셔주는 이분들의 시집과 수필집을 읽으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꾸었다.


이십 대에는 심리학 관련 책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프로이트나 융과 같은 대심리학자들의 책을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냥 무작정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나의 지적 허영심을 채우려는 목적은 아니었나. 그렇게 어렵고 이해 안 되는 책을 읽다니!


삼십 대에는 드라마 '토지'의 영향으로 '토지' 소설 전집을 빌려서 모두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동네마다 비디오테이프와 소설류의 책을 빌려주는 비디오방이 있었다. 남편은 거기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리고 나는 주로 대하소설을 빌려서 읽었다. 토지 외에도 '태백산맥'과 같은 대하소설을 한 번에 두세 권씩 빌려서는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십 대가 되면서부터는 교육학 관련 전공서적을 탐독했다. 독서라기보다는 암기에 가깝다. 승진시험을 위해서 12과목의 깨알 같은 교육학 서적을 구석구석 열심히 메모하면서 읽고 또 읽으면서 암기했다. 승진시험에 합격하고 나서는 좀 더 여유롭게 교육학 관련 서적을 포괄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주로 혁신교육에 관한 책들과 연구방법에 관한 책들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을 쭉 돌아보니 책과 함께한 세월이다. 그렇다고 책을 끼고사는 독서광은 아니었지만 항상 내 곁에는 책이 있었다. 어린 시절 아라비안나이트를 비롯한 동화책부터 세계명작, 단편소설, 대하소설, 그리고 전공서적까지! 되돌아보면 책에 책잡힌 세월이었다. 책에 박힌 글들을 먹으면서 나의 생각주머니는 점점 여물어져 갔다. 책에 책잡히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책이 나를 나답게 만든 장본인이다.


장한종 책가도 8폭 병풍, 18세기 말~19세기 초, 195x361cm 종이에 채색, 경기도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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