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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타임즈W May 28. 2020

책으로 떠나는 여름 피서

<여름의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내 일상의 행간엔 늘 ‘책’이 있었다. 바쁜 일상 속 틈틈이 읽는 책 한 권만큼 나의 워라밸 라이프를 풍요롭게 만들어준 것도 없다. 어떤 책이든 저마다의 교훈을 담고 있고, 내가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서 같은 책이라도 다른 해답을 보여준다. 미술책에서 사랑을 배우기도 하고, 에세이에서 청소법을 익히기도 한다. 오늘 내가 읽고 추천한 책을 통해 당신은 무엇을 발견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여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생각할 때 늘 첫 번째로 꼽는 대상이다. 매년 여름이 사라져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다시 여름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1년을 보낸다. 뜨거운 햇살, 계곡물 아래 수박, 등에 자국이 남던 대나무 돗자리, 덜덜덜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 바닷가의 짠 냄새···. 어릴 적 여름의 강렬한 추억들이 여전히 나를 사로잡는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산과 바다로 떠나던 여름 방학의 설렘은 비행기를 타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나게 된 직장인의 여름 휴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마음이 어지러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여름은 올 듯 말 듯 오지 않았고, 훌쩍 떠나지 못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꽉 찼다. 


여름 책으로 피서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마스크도 없이 핀란드 작은 섬으로, 일본 숲속의 여름 별장으로, 이탈리아 작은 마을의 해안가 별장으로 숨어들었다. 어지럽던 머릿속은 안개가 갠 것처럼 맑아졌고, 흐린 눈이 총명하게 떠지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현실의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여행에서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었다. 책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한결 가뿐해져 다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음사의 문고판 시리즈인 '쏜살 문고'의 '여성 문학 컬렉션'으로 출간된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과 <두 손 가벼운 여행>. / 사진=민음사


할머니와 손녀의 여름 섬 이야기, <여름의 책>

몽환적인 분홍빛 하늘과 바다 위에 뜬 푸른 섬의 표지를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겼다. 토베 얀손이 쓴 여름의 책이라니. 토베 얀손은 핀란드의 국민 캐릭터인 무민 시리즈를 만든 동화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무민 책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하얗고 포동포동한 하마를 닮은 캐릭터는 익숙할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핀란드의 작은 섬이다. 주인공은 어린 소녀 소피아와 그녀의 할머니, 아빠가 전부다. 그들은 매년 작은 섬마을에서 여름을 보낸다. 과묵한 아빠는 바다 일을 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할머니가 소피아를 돌본다. 사실은 ‘돌본다’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엄마가 없어서 불쌍한 아이 혹은 아이를 마냥 감싸는 인자한 할머니는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소피아와 할머니는 둘 다 매우 독립적이고, 개성이 강하며, 솔직하다. 


도시의 할머니들과 달리 자연의 할머니는 생동감이 넘친다. 할머니는 나무를 깎아 조각하고, 마른 갈대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거나, 감자를 캐기도 하고, 수억 마리 벌레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여름의 황홀한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소피아는 성장하고, 할머니는 점점 한 때 중요했던 것들을 잊어가지만 둘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최고의 친구다. 할머니는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손녀에게 조심하라고 말하는 대신 아이 스스로 모험을 겪고 성장하도록 기다려준다. 때로는 ‘사유지, 상륙 금지’ 푯말을 보고 화가 나서 손녀를 데리고 사유지에 몰래 올라가 ‘인생 경험을 넓혀주기도’ 한다. 


핀란드 난탈리에 위치한 '무민 월드'에서 아이들 틈을 비집고 달려가 찍은 한 컷. / 사진=김수영 기자


책을 읽는 동안 핀란드에서 보냈던 어느 초여름의 기억이 떠올랐다. 백야로 해가 지지 않아 저녁 9시까지 햇살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고, 무민 월드에서 무민 인형과 사진을 찍고, 뜨거운 사우나를 즐기기도 했다. 여행 중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동행한 핀란드인은 ‘시수(Sisu)’ 정신을 가르쳐주었다. '내면의 힘'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역경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핀란드의 철학이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고요한 여름 섬 안에서 자연과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는 할머니와 소피아에게 시수 정신을 다시 배웠다. 


푸른 숲을 표현한 겉장을 벗기면 나무 질감의 표지가 등장한다. / 사진=비채, 김수영 기자


푸른 여름 별장의 고아한 풍경,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여름의 책>이 섬 바다의 푸른 여름을 이야기한다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표고 1000미터가 넘는 숲의 초록 여름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화산 기슭에서>라는 일본 원제보다 한국판 제목이 훨씬 마음에 와닿는다. 책의 디자인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뒤덮인 겉장의 그림과 종이 질감부터 겉장 안쪽의 나무 무늬 표지까지 책 속에 등장하는 건축처럼 디테일이 뛰어나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사카니시 도오루는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존경하는 건축가인 무라이 슌스케 선생의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게 된다.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는 매년 여름 한 철을 일본의 고급 별장지인 가루이자와의 별장에서 보낸다. 책의 주 내용은 여름 별장에서 ‘국립현대도서관’이라는 거대 건축 경합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겪는 이야기다. 


무라이 선생은 현시적인 화려함을 표방하는 압도적인 건축물이 아닌, 소박하고 단아한 건축, 튀지 않고 주변에 녹아드는 공간, 쓰는 사람이 편안한 집을 추구한다. 책의 서술 역시 무라이 선생의 건축처럼 자극적인 내용 없이 담백하고 편안하면서도 더없이 아름답다. 저자 마쓰이에 마사시는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것 같은 탁월한 표현으로 여름날의 풍경을 묘사한다. 이른 새벽 산책 나가는 노건축가의 소리를 자명종 삼아 일어나, 소박하지만 정갈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나이프로 연필을 깎는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된다. 안개 낀 새벽 새들의 지저귐, 나무의 촉촉한 냄새, 태풍이 불던 날 정전된 방 안에서 타는 장작 소리가 오감을 깨운다. 


일본 후쿠오카의 '라쿠스이엔' 정원에서 맛본 말차. / 사진=김수영 기자


나 역시 여름 일본 여행에서 무라이 선생의 건축 같은 정갈함을 맛본 기억이 있다. 료칸에서 먹은 깔끔한 아침 식사, 모형처럼 아기자기하던 정원, 그곳에서 마셨던 쌉싸름한 말차의 끝 맛, 네모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던 집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제는 일본으로 여행을 떠날 수 없지만, 그 가지런한 아름다움이 그리울 때면 이 책을 꺼내 읽을 것 같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후속작 <파인드 미>. 몽환적인 이미지가 첫사랑의 묘한 감정을 그대로 남아낸 듯하다. / 사진=잔


여름보다 뜨거운 첫사랑의 순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앞선 두 책의 의연함과 달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한여름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다. 책은 2017년 <그해, 여름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원작의 리마스터판으로, 후속작 <파인드 미>와 함께 재출간되었다. 마치 영어 원서처럼 영문 제목만 심플하게 적힌 몽환적인 표지는 첫사랑의 묘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낸 듯하다. 


열일곱 소년의 금지된 첫사랑을 표현하기에 여름만큼 좋은 계절이 있을까.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하고, 불꽃처럼 열정적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불안한 첫사랑의 심리 묘사들이 깜짝 놀랄 만큼 솔직하고 대담하며 에로틱하다. ‘첫사랑의 마스터피스’라고 불릴만한 안드레 애치먼의 감각적인 언어는 열일곱 소년 엘리오와 스물넷 청년 올리버의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피아노 연주와 책이 삶의 전부인 엘리오는 여느 해와 같이 이탈리아 작은 마을의 해안가 별장에서 부모님과 함께 여름을 맞이한다. 그의 부모님은 책 출간을 앞두고 원고를 손봐야 하는 젊은 학자들을 초대하곤 하는데, 그해 여름 손님은 스물넷의 미국인 올리버다. 엘리오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신비한 매력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매료시키는 올리버에게 첫눈에 반하고 거침없이 빠져든다. 올리버가 입은 바지 색으로 감정을 추측해보는가 하면,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그가 올 것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그를 위해서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다가도, 살아 있는 폐 조직이 전부 찢긴 것처럼 입이 마르고, 그를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올리버는 엘리오보다 자신의 감정을 노련하게 숨길 줄 알지만, 그 역시 엘리오에게 빠져 허둥대는 것은 마찬가지다. 


원작보다 먼저 접한 동명의 영화에서 나는 엘리오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라는 배우에게 푹 빠지기도 했다. 특히 야외 테이블에 다같이 모여 와인을 마시거나, 수영장 옆에서 책을 읽고, 자전거를 타는 풍경이 지중해 여름의 낭만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벅찼다. 인생 첫 해외여행으로 홀로 유럽을 떠났을 때 만났던 이탈리아 남부 바다의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올리버는 엘리오가 다가갈 때마다 “나중에!”라며 피하지만, 결국 둘은 멈출 수 없는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이자 가장 유명한 대사를 통해 몸의 관계를 넘어 누구와도 공유한 적 없는 정신 영역까지도 함께 해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작가의 철학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 충격적 장면 중 하나인 복숭아 씬은 책에서 살구로 표현되는데, 영상으로 보나 글로 보나 ‘복숭아(살구)의 재발견’이 놀랍기만 하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엘리오의 모습은 때론 무모해 보이지만, 우리 모두의 열병 같은 첫사랑을 소환한다.


데일리타임즈W 김수영 기자 dtnews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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