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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게 쓰길 원하지만 간결하게 쓰면 두렵다

부하직원이 파워포인트로 쓴 보고서를 보면 한 장표에 서너 가지 내용을 막 집어넣는다. 빈 공간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뭐든 채운다. 단순하게 쓰고 간결하게 쓰고 핵심만 쓰라고 해도 여전히 꽉꽉 채운다.


이런 심리를 공백 공포라고 하는데 빈 공간을 정보나 사물로 가득 채우고 싶어 하는 욕구를 뜻한다. 그런데 매장 쇼윈도에 마네킹, 옷, 가격표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정도와, 매장에서 파는 의류의 가격은 반비례다. 대량 판매 매장이나 시장의 상점은 수많은 마네킹과 산더미 같은 옷, 광고 홍보 문구나 할인 표시가 쇼윈도 구석구석을 빼곡히 채운다. 이런 상점에서 파는 의류는 가격이 싸다. 반면 고급 상점이나 명품 매장은 마네킹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 놓는다.


보고서 작성자는 한 장표에 글을 적게 쓰면 쓸수록 여백이 커지면서 자기가 쓴 글의 가치가 급상승하는 것을 느낀다. 몇 글자 안 되는 그 글이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지 본인 스스로 의심하며 부담이 커진다. 그래서 보다 안전한 선택, 즉 이것저것 관계없는 것까지 잔뜩 끌어 모아서 장표를 시장 노점 판매대처럼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하면 각각의 글의 가치가 낮아지고 부담도 작아지는 한편 열심히 한 노력이 스스로 가상해 보인다. 그래서 부하직원은 항상 여백 없이 여러 이야기를 뒤범벅해서 적는다.


결국 검토자의 역할은 노점 판매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옷 중에서 빛나는 명품 의류를 찾아내고 나머지는 싹 다 치우는 것이다. 하지만 검토자도 작성자와 같이 공백 공포를 갖고 있다. 본인도 역시 상사에게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모티베이터(조서환 저)에 나오는 글이다.


광고대행사 디디비 니드햄의 이용훈 사장은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광고주가 광고의 메시지가 너무나 단순하다고 지적하자, "자, 이사님. 일어나 보시죠." 하고는 미리 준비해 간 테니스공 두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사가 "뭐야, 공을 왜 던져." 이러면서 하나도 못 받더란다. 다시 공을 가져오라고 해서 "잘 받아보세요. 두 개 던질 테니까." 이러면서 던졌다. 결국에는 하나밖에 못 받았고, 그 하나도 막 흔들거리면서 받았다. 그런데 "하나만 던질 테니 잘 받아보십시오." 이러고 하나만 던지니까 바로 받는다. '동시에 여러 개 얘기해봐야 다 꽝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못 받는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나. 하나만 말하라'는 의미다.


이 유명한 일화는 필자가 문서 작성 교육을 할 때 종종 사용한다. 간결한 글쓰기를 설명할 때 예로 드는데, 그때는 직접 매직펜이나 볼펜을 몇 자루 들고 던지곤 한다. 그런데 광고대행사 사장은 광고를 기획하여 고객에게 발표하는 자리에 왜 쓸데없는 테니스공 두 개를 준비했을까? 광고대행사가 만난 광고주마다 한 줄의 메시지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작성자도 그렇고, 검토자도 그렇고, 최종 피보고자도 그렇다. 모든 문서 작성 책과 유명 글쓰기 저자들이 간결하게 단순하게 핵심만 하나의 메시지만 쓰라고 한다. 정작 검토하는 사람이나 보고 받는 사람은 정말 그렇게 써올까 두렵다. 그런데 이런 건 노파심이다. 어떤 부하직원도 우리가 두려울 정도로 간결하게 써오지 않는다.


김철수 씀. 2016.12.5

vitaminq4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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