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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와이 Mar 26. 2019

부모는 자식의 아이가 된다

 의사로 일하면서, 자기 부모의 머리를 쓰다듬는 자식들을 여럿 봤다. 우리 문화에서 부모는 공경해야 할 존재, 때로는 어렵기까지 한 대상이다. 그래서 처음에 봤을 땐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들은 자기 부모를 이제는 아이처럼 생각하고 대했다. 부모는 노화 앞에 천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자녀들은 늙은 부모 앞에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게 우뚝 서 있었지만, 그런 자기 모습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당혹해했다.

 생각해 보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인류의 무의식에 숨은 오랜 욕망이다. 아들은 평생 아비를 넘기 위해 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런 심리를 "모든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원한다."는 강렬한 대사를 빌어 묘사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녀는 내 분신이다. 그런데 아버지란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어머니를 빼앗아 자기 침실로 데려갔다. 밉다. 명백한 나의 적이다. 저항하고 싶다. 그를 이기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약하다. 나는 아버지의 보호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무기력한 포로이다.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상하게도 그는 나를 좋아하는 듯 보인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지켜주며, 참고, 기쁘게 해 주려 노력한다. 나는 그가 싫지만 가끔은 좋아지기도 한다. 강하지만 자애로운 그를 닮고 싶다.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 이길 수 없는 적이지만, 그를 존경한다.  


 언제까지나 강할 줄 알았던 아버지의 노화는 누구에게나 충격적인 현실이다. 나는 커지고 부모는 작아진다.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높은 벽이 무너지고 있다. 그렇게도 뛰어넘고 싶었던 부모의 큰 어깨가 실제로 쪼그라들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이는 없다. 어느새 포로는 오랜 적을 사랑하게 되었다. 곧 육친과 이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필부는 울곤 한다. 이들은 늙은 어버이를 내가 지킬 때가 왔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부모는 그렇게 자식의 아이가 된다. 나는 이들에게 무례함보다는 사랑을 느낀다.  


 




 현대 중환자 의학을 꿰뚫는 큰 콘셉트이라 한다면, 인간의 수명을 어떻게든 연장시킬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라 하겠다. 인체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철학이며, 이러한 접근법은 웅장한 현대의학을 일궈 냈다. 의과학자 들은 차를 오래 타면 부품 하나씩 망가지지만 교체하면 또 굴러가듯이, 장기 하나씩 망가져도 대체 도구만 있다면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 포함되는 환자들은 현대의학에 많은 빚을 진 수혜자들이다. 신장이 없어진 사람도 이틀에 한 번 투석하며 몇십 년 더 살았고, 숨을 못 쉬어 한 번 죽었어도 기관 삽관하고 부활했다. 심장 같은 중요한 장기까지도 현대의학은 심지어 대체 도구를 만들어 냈다. 실로 대단한 인류의 유산이다.

 한편, 이렇게 살아가는 환자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저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싶기도 하다. 어떤 보호자들은 마음이 아픈 나머지 사랑하는 환자를 살려 주는 고마운 도구를 '이 지겨운 것' 이라며 폄훼한다. '생명유지장치'란 단어가 부정적 뉘앙스로 더 많이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과학자들은 신체를 신성시하지 않는다. 장기는 대체 가능한 기계 부품같은 것이다.

Photo by: eric-michael on unsplash


 내가 본 80대 후반의 이 남자는 생명유지장치를 장기마다 달고 있던 사람이었다. 배짝 말라 거죽만이 뼈를 덮고 있는 시체 같은 몸을 가졌었다. 수많은 관들이 TV 뒤 먼지 쌓인 전기코드처럼 몸 위로 뒤엉켜 있었다. 암으로 담관이 막혀 담즙이 고이자 몸 밖으로 빼는 관을 복부에 수 개 박고 있었고, 복수를 빼는 관 몇 개, 밥도 아니고 약 투여만을 위한 비위관 하나, 승압제와 영양제 투여를 위한 팔의 중심정맥관 하나, 쇄골 아래 투석 도관 하나, 숨쉬기 힘들어 산소투여 위한 콧줄 하나······. 누구라도 원하지 않을 끔찍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미 여러 번의 수술로 몸이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곧 떠날 수도 있는 가녀린 몸. 보호자는 식사도, 말도, 심지어 눈도 못 마주치는 아버지에게 자주 말했다.


아빠, 나랑 놀자

 놀기와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그였지만, 그 말에는 이따금씩 반응하곤 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치 어린 기분이 뾰로통한 어린 자식에게 '엄마랑 놀자-.' 하면 금세 헤헤 거리며 달려오듯이, 아비는 놀자는 말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딸의 자식이 되어 있었다.

 무기력한 환자들 중 많은 수가 젊은 시절 들풀을 헤집으며 인생을 산 야인(野人)이었다. 보호자들은 심하게 대비되는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의사에게 쓰린 기억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들은 기억 속 부모를 소환하며 현실을 잊었고, 나는 환자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의 인생의 시작과 끝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생각의 끝은 언제나 답을 낼 수 없는 질문 하나였다. 인생은 허무한가, 아니면 의미 있는 것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전직 야인은 75세 남자였다. 아들은 얼굴 선이 굵고 풍채가 좋은 건장한 중년이었다. 아들을 보면 생전 환자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구부러지느니 부러질 강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험한 건축일을 했다고도 했고, 매일 술 마시는 호걸들과 어울리며 산업화 시대를 살았던 강한 남자였다고 했다.

 그런 그는 75세에 처음 입원이란 일을 겪게 된다. '부신기능 저하입니다. 스테로이드를 당분간 써야 합니다.' 란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오래 입원할 거란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림잡아 5개월 정도를 입원해 있었다. 긴 입원은 강인하던 그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위장관 출혈이었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이다. 예방적으로 위장관 보호제를 쓰지만, 예방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어느 날 흑변을 보았고, 맥이 빨라졌고, 얼굴이 하얘졌고, 혈압이 떨어졌다. 장 어딘가에서 피가 새고 있었으나 약간 늦게 알아챘다. 활동성 위장관 출혈은 초응급이다. 의료진은 즉시 내시경 지혈술을 시행했다. 당시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기관삽관을 했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보호자는 환자를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환자는 살아났다. 눈을 뜨고 기관삽관 튜브를 뽑고 다시 병실로 올라왔다. 하지만 한 번 멈췄던 심장은 장기 전반을 망가뜨렸다. 그중 하나는 신장이었다. 그는 일생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투석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일주일 세 번, 냉장고만한 투석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강요당했다. 지병으로 간암이 있었지만 암 같은 무서운 병의 치료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암은 나중 문제고, 일단 지금 살려 놔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내가 새로 그의 병동 주치의를 맡아 면담했을 때, 아들은 "이렇게 보낼 순 없어요."라고 말했다. 간절한 눈이었다. 젊고 힘 넘치는 그는 제대로 된 작별이라면 모든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 보였다. 싸움은 아버지의 몫이지만, 자기 싸움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맞아요. 이렇게 보낼 순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입원이 길어지면 환자도 문제지만, 보호자 역시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의사들끼리 "긴 입원 앞에 착한 보호자는 세상에 없다."라고 할 정도다. 그런데 이 보호자는 고맙게도 긴 입원에 불평 한 마디 없이 모든 치료에 협조했다. 그는 내게 자주 고맙다고 했고, 나도 그에게 가끔 잘 따라와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환자와 강한 라포가 형성되게 되면 정말 온 힘을 다해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즈음해서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이 환자를 자주 보러 가고, 하루 종일 10분 단위로 환자 차트를 열어 보고, 휴일에 집에 와서도 당직에게 전화를 걸어 봐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떠올려 보면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이 그를 위해 쓰였다. 그렇게 내가 병동 주치의를 맡은 한 달이 지났다. 내 노력 덕인지 환자가 잘 버텨 준 것인지 그는 조금씩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31일 주치의가 끝나던 날 "할아버지, 잘 지내세요."라고 말했을 때 환자는 웃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났다. 나는 병동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낯익은 이름을 들었다. 그의 이름이었다. 간호사들은 그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라고 인계하고 있었다. 뭐라고? 내가 떠날 때만 해도 좋아지고 있었는데. 퇴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힘들 게 이뤄낸 회복이었는데. 환자와 의사와 보호자 모두 한 마음으로 싸웠는데. 그런 그가 왜? 나는 차트와 여러 검사 결과를 열었다. 가슴 엑스레이를 보니 달갑지 않은 뭔가가 폐 전체를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닥쳐오는 허무함에 탄식했다.

 어이없게도 독감이었다. 독감이 유행하기 전 완벽히 회복시켰어야 했는데 조금 늦었다. 건강한 이들에게 독감은 그저 '독한 감기' 정도의 개구쟁이를 겪은 짜증스러운 며칠이겠지만, 그에게는 수개월의 공든 회복의 탑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절망스러운 사건이었다. 누군가의 과오라 하기도 어려웠다. 병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주치의가 응급실 환자를 보고 옷에 묻혀 왔을지도, 옆 방 환자를 보러 온 방문객이 이 환자의 문 앞에 바이러스를 떨구고 갔을 수도, 보호자가 어린 아들의 감기를 배달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방을 찾아갔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예전 주치의로서 노력한 한 달을 떠올렸다. 걸으며 보호자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어떤 말을 하더라도 '참 허무하네요.'만큼은 안 될 것 같았다. 실제로 너무 허무했기에 더욱 해서는 안 되었다. 내 말 한마디에 보호자는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덩치 큰 아들은 오늘도 방 안에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침대맡에 엎드려 있었다. 내가 주치의일 때에도 많이 봤던 모습이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내 인기척을 느끼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저 반갑지만은 않은 이 상황이 방 안을 무겁게 가라 앉혔다.


 "참, 허무하네요. 선생님.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환자의 빛나던 흰 머리칼은 회색으로 녹슬어 있었다. 나는 아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의사로서 가장 적절한 대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라고, '많이 고생하셨고 그저 이런 마지막에 마음이 아플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마음에 없는 말이었지만 이걸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방문을 닫고 나오며 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즘 부쩍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저번 주에 내가 '건강 좀 챙기라'는 잔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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