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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와이 Mar 25. 2019

가난한 사람의 입원

환자가 당한 갑작스러운 사건, 다른 말로 급성 악화는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치료는 내 직업의 궁극적 목표다. 누군가를 병에서 구했다면 그는 내 환자다. 나는 의사면허를 걸고 이들의 문제를 찾아낸다. 의사 직업의 성격으로 흔히들 환자가 나았을 때 보람을 말하는데, 보람은 나중에나 느끼게 된다. 그보다 어깨에 큰 짐 진 마음가짐으로 일한다.  

일단 입원하면 나는 매일 내 환자를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집에 가도 입원 환자 생각이 난다. 잘 때도 떠오르고, 주말에 쓰레기 버리면서도 생각한다. 입원환자가 적은 채로 주말을 맞으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 받은 숙제가 적기 때문이다.


 입원환자는 나 같은 전공의가 하루 종일 돌본다. 하루 종일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을 면밀히 관찰해야 할 의무가 주어지기에, 자기 능력 밖의 너무 많은 환자가 입원해선 안 된다.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가족처럼 돌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환자들에게는 그들만의 가족이 있다. 나는 가족이 아닌 주치의로서, 의학적으로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돌볼 수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며, 입원이 불필요한 사람은 입원하여 내 에너지를 쓸데없이 뺏어갈 것이므로 최대한 막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집중한다. 이것이 의료윤리의 5원칙 중 '정의의 원칙'이다. 의사에게 한정된 의료자원을 잘 배분할 의무가 있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입원이 불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이런 이들의 입원을 세금 도둑질로 보고 경멸한다. 가벼운 단순 접촉사고로 하나도 안 아픈 젊은 남자, 단순히 기력이 없는 정도지만 손은 많이 가는 늙은 아버지, 철없는 남편 밥 해주기 싫은 할머니, 추운 집이 싫은 술꾼······. 보통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많다. 무너져가는 싸늘한 집보다는 밥 주고 돌봐주고 따뜻한 병원에 있고 싶은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낸 세금으로 말이다.


 나는 이런 이들을 특히 매몰차게 대한다. 결코 쉽지는 않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은 언제나 나를 심란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나의 이런 마음이 역겨운 것일 수도 있다. 정작 그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물질적 잣대를 들이대 '가난한 사람'으로 멋대로 정의하고 불쌍하게 여긴다면, 나는 오만한 사람이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 입원을 애원하는 이들을 보고 딱한 마음이 잘 든다. 그래서 거절하는 데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경우는 성공한다. 당신은 입원이 불필요하다고 딱 잘라 말한다. 입원시켜달라고 화를 내며 요구해도 안 된다고 한다. 나는 누군가의 세금이 헛되이 쓰이는 게 싫다. 병원의 도움을 진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간접적인 해가 가해지는 것도 싫다. 어떤 동료는 "그냥 입원장 드려. 그렇게 하는 게 갈등도 없고 마음 편해."라고도 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응급실에 그런 사람이 왔다.


굳이 입원이 필요할까? 하는 사람이 응급실에 왔다

 78세 할머니였다. 기력이 없어서 왔단다. 초진을 본 응급의학과 의사에 따르면 피검사 엑스레이 모두 좋고 생체징후도 좋다고 했다. 그럼에도 귀가시키지 않고 내과에 연락을 한 이유는 입원을 원해서였다.
 나는 과연 입원할 만한 사람인지 살펴보았다. 몸무게 35킬로그램의 할머니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혀는 종잇장처럼 말라 있었고 잘 못 먹었는지 전신에 지방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탈수가 심했지만 갑자기 온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못 먹어서 천천히 온 변화였다. 할머니는 몇 시간 대기하면서 피로한 지 자고 있어 말 걸 수가 없었다. 처음 응급의학과에서 작성해 둔 기록을 보니 몇 개월 정도 잘 못 먹었다고 했다.

 그래, 그냥 노화다. 나이 먹었으니 기력이 쇠하고, 이제 천천히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 정도이다. 입원해도 딱히 해 드릴 건 없다. 수액을 드려도 퇴원 후 이런 악순환은 계속될 거고, 현재 보이는 급성 증세도 없다. 열도 없고 혈압 맥박 모두 정상이다. 종합병원은 급성기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다. 할머니가 갈 곳은 여기보다는 요양병원이었다. 나는 퇴원을 권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개 할머니 보호자분."


 나는 목소리가 큰 편이다. 내가 한 번 불러서 잘 못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대기실이 울리도록 큰 목소리에도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아무개 할머니 보호자분."


 두 번째 불렀을 때 누군가 내 바로 앞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게 보였다. 환자의 남편이었다. 그는 첫 번째 보호자 호출을 진작에 들었지만, 거동이 불편해 반응이 느린 사람이었다. 잿빛의 흙을 뒤집어쓴 낡은 야구 모자에, 셔츠와 나일론 바지 전체가 오래된 먼지로 덮인, 그야말로 누더기를 걸친 노인이었다. 눈에 보이는 강한 가난의 증거는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 평소 "나는 가난하오. 나를 입원시켜 주시오." 애원하는 자들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어도 단호하게 퇴원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똑같은 환의 아래 평등해 보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이 환자를 집에 보낸다는 의미는, 눈 앞의 저 보호자, 그러니까 지금 간신히 낡고 약한 육체로 가난을 지탱하는 저 남자에게 "당신 좀 더 고생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환자를 입원시키고 싶어 졌다. 보호자를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환자가 아닌 보호자를 보고 입원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정의의 원칙을 들고 살아야 하는 의료인이다. 나는 지금, 인간적인 마음마저도 뒤로 하고 모든 자원을 정의롭게 배분해야 할 임상현실의 파수꾼의 역할을 마다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갈등하는 내게 노인이 먼저 말했다.


 "저는 아무개의 남편입니다. 제가 보호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보호자의 격을 갖추지는 못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만의 보호자가 필요해 보였다. 내 안에 약간의 괴로움이 피어올랐다. 이 약한 사람이, 그래도 가족은 내가 지킨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기 괴로웠다.


 "할머니가 많이 힘드신 것 같아요."

 "네, 그렇지요?"

 "그런데 피검사나 이런 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요."

 ''그런가요. 퇴원하라면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보호자분. 입원이 필요합니다."


 내가 먼저 입원장을 드렸다. 그리고 병동 주치의에게 인계할 때는, 비싼 비급여 치료는 웬만해선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동정의 마음은 이렇게도 골치 아픈 것이다. 그를 딱히 여기면서도 연민의 마음이 알량한 것은 아니었나 고민하게 되고, 도와주면서도 마음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마음 졸여야 하고, 손에 쥐어 드릴 게 있을 땐 적당한 것이었나를 걱정하게 되고, 뒷모습을 보면서는 괜히 도왔나 하는 마음도 가끔씩 느껴가면서, 자기 혐오감을 안는 경험을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나를 이렇게 심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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