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도 잘 모르는 수술 동의서를 읊다시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 듣더니 궁금한 것들 백 개 정도를 쏟아 냈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것이 적었다. “자세한 것은 집도의에게 들으세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것도 잘 모릅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나는 좌절한 남자 앞에서 앵무새같이 모른다는 말만 웅얼이다가 지쳐 버렸다. 나 때문에 의료진 전체의 실력이 의심받는다는 생각이 들자, 결국 선배 의사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사실 저는 올해 막 의사 된 인턴일 뿐입니다."
심지어 첫 달이었다. 의사라 불러주면 그저 고맙고 부끄럽던 새끼 의사, 인턴.
병원 우스갯소리로 '인턴 밑에 바닥 있다.'라고들 한다. 이들은 적절한 수련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짬' 부족한 사관생도 같은 대접을 받는다. 인턴은 사실 무늬만 의사다. 급성기 치료가 이뤄지는 종합병원 안에서는 일 하는데 방해나 되는 그런 존재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욕먹지 않을 수 없다. '청운의 꿈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의사가 되었는데······.' 인턴은 큰 자괴감에 빠진다.
인턴 첫 달은 신경외과였다. 신경외과는 앞서 말한 정신적 압박은 없었지만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수련 전체를 통틀어 이때가 최악이었다. 매일 수면부족에 시달렸고 3시간 자면 많이 잔 편이었다. 한 달 동안 퇴근했던 시간은 전부 6시간. 그나마도 과장님이 인턴 놈 불쌍하다고 보내준 것이었다.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나보다 레지던트 선배들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 레지던트는 과중한 업무를 참다못해 전화기를 끄고 도망쳤는데, 나가는 도중 너무 졸려서 잠깐 병원 벤치에 앉아 곯아떨어졌고 곧 선배에게 발각되어 잡혀 끌려갔다고 했다. 또 다른 레지던트 하나는 어차피 병원에서 하루 종일 있기 때문에 집이 따로 없었다. 거주지는 중환자실 당직실이었다. 연초에 주차한 차는 일 년 내내 출차할 일이 없었다고 하고 차 안에 모든 살림살이가 들어 있었다. 고무신발을 일 년 내내 신고 다녀 발 뒤꿈치는 입은 가운만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덕분에 그는 매우 숙련된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아마도 그 값으로 목숨 몇 년이 치렀을 것이다.
응급실로 환자가 오면 응급의학과 의사가 초진을 보고, 입원이 필요하면 각 분과를 호출한다. 앞서 말한 환자는 20대 중반의 젊은 여자였다. 어머니가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응급실로 데리고 왔다. CT를 찍어 보니 뇌출혈이었다. 응급의학과는 신경외과를 응급실로 호출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신경외과 의사들은 방금 전 수 시간의 수술을 막 마치고 쉬고 있던 참이었다. 이 날의 집도의는 그녀의 CT를 보고는 한숨을 내 쉬었을 수도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수술할 케이스는 맞는데 너무 피곤했을 테니까. 그는 내게 편한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인턴 선생."
"네! 선생님. 호출하셨습니까!"
"응급실에 헤모리지(Brain hemorrhage: 뇌출혈) 하나 있어. 응급 수술해야 하니까 네가 내 대신 내려가서 수술 동의서 받고 수술방 준비해 놔."
"네, 선생님!"
"할 줄 알지?"
"네, 선생님!"
나는 심지어 벌떡 일어서서 전화를 들고 "네, 선생님!"을 복창했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으로서 상급자의 지시 하나하나는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의 지시사항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일단 안다고 대답해야 했다. 물론 개두술의 전반적인 내용은 배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술방도 들어가 본 적도 없고, 구체적인 테크닉, 마취 과정, 깨어나는 과정, 예후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다. 이대로 갈 순 없기에 재빠르게 수술과 관련한 내용을 훑고, 수술방 준비를 마취부에 알리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보자. 갑자기 딸이 쓰러졌고, 응급실에 갔더니 문제 있다고 호들갑을 떨고, 신경외과 의사를 호출했으니 수술 설명 들으라고 하고, 그리고 의사 하나가 내려왔다. '아! 저 사람이 내 딸을 살릴 집도의구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그를 실망시킬 거의 모든 요소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부적절한 대답을 하는 데 지친 나는 급기야 "저는 고작 인턴입니다."라고 고백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알았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붙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줄이라고 생각했는지 질문 폭격은 계속되었다. '당신이 초짜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아는 게 있으면 대답해 다오.' 식이었다. 몇 개는 답변 가능했다. 응급실에 오기 전 잠깐 책이라도 읽어 보고 오기 다행이었다.
그녀는 곧 수술방으로 올라갔다. 수술방 준비가 끝나니 수술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신경외과 의사들은 24시간 수술을 위해 준비된 상태였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수술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굉장한 체력이었다. 한 달의 인턴 동안 엿본 이들 의사의 삶을 통해 나는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는 앉기만 해도 자던 피곤한 육체였지만 수술만 시작되면 눈을 반짝였다. 체력으로만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업무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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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술이 끝났다. 피투성이 라텍스 장갑 모은 두 손 위로 그녀의 자른 두개골 일부가 담겼다. 뇌 감압이 끝나면 수개월 후 다시 끼워 맞출 뼈였다. 나는 해골을 들고 병리과로 가져갔다. 뼈를 보관할 곳은 굉장한 크기의 냉동고였다. 냉동고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뼈가 냉기 속에서 다시 주인의 머리 위에 얹히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 냉동고가 있는 방은 어스름한 형광등 하나뿐이어서, 쌓인 해골들과 냉기, 어둠이 공포영화 분위기를 연출했다. 왠지 모를 불안한 미래를 느껴졌다. 하지만 근거 없는 두려움이었기에 나만이 간직해야 할 것이었다.
보호자는 대기실 모니터에 뜬 딸의 이름 옆 ‘수술 중’만 보며 몇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수 시간의 수술 후 신경외과 의사는 보호자를 만나 짧은 설명만을 남기고 홀홀 떠났다. 그래서 환자의 아버지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내가 환자 두개골을 냉동고에 넣고 복도를 지나고 있었는데, 멀리서 발견하고 뛰어 왔다. 아버지란 사람은 나름 나를 좋게 평가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도 수술방에 들어간 지를 확인하고는 이것저것 수술에 대한 질문을 던져댔다. 아까 응급실에서 드린 실망감을 만회하기 위해 나는 아는 모든 것을 말했다. 그를 돕고 싶기도 했고, 의사로서 인정받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하루 종일 발길에 치이는 돌 취급을 받다가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이로 격상된 기분은 황홀했다.
당시 나는 환자와의 관계를 연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경험 많은 의사가 되면 임상에 열중하느라 바쁠 테니 밑바닥에 있을 때 환자와 인간적인 관계를 많이 다져보자.’는 것이었다. 예전에 엠마 톰슨 주연의 '위트'라는 영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었는데, 거기 나오는 한 장면이 이런 결심에 한몫했다. 영화에서는 큰 성공을 거둔 한 여자가 암에 걸려 죽어간다. 그녀를 병을 가진 대상으로만 보는 비인간적인 주치의와 대조적으로, 아이스크림을 같이 까먹으며 수다를 떨던 담당 간호사의 모습. 나는 간호사의 인간적인 면모에 반해, '나도 쓸 데 없는 얘기도 해 보고, 같이 간식도 먹어보고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냈다. 환자와 오래 있을 수 있는 술기, 예를 들면 드레싱이나 도관 세척 같은 일은 남의 일이라도 내 업무로 가져오곤 했다.
그러던 중 환자의 보호자가 먼저 나를 찾은 것이다. 그들은 내 자세한 설명을 들은 그 날 이후 나를 볼 때마다 반겼다. 나는 인정받는 기분이 좋아 일부러 병실에 회진을 돌곤 했다. (인턴은 주치의가 아니기에 회진을 돌 필요가 없다.) 환자는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정신도 많이 맑아졌다. 단지 성격이 많이 변했다 했다. 목표지향적이고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의 똑똑하던 그녀는, 수술 후 바보같이 핸드폰 게임만 하고는 했다. 보호자들은 매우 걱정이 많았다. 그들은 내가 뛰어난 심리치료사라도 되는 양 조언을 구하고는 했다. 그때 나는 높이 오른 기분에 취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인턴 시절 중 가장 후회되는 실수인 그 한마디를 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예전보다 가족이 화목해지셨다니까, 복된 병 아닐까요.
당시에는 몰랐다. “네 맞아요, 선생님. 정말 그래요. 복된 병이죠.” 보호자들의 동조하는 말에, 그에 또 으쓱한 기분에 모든 감각이 무뎌졌던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아이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모습에 그야말로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다. 갑자기 떠오른 그 날은 일 년 뒤, 기차 안에서였다.
아내는 친정에 가 있는 동안 진통을 느꼈다. 나는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산부인과가 있는 서울에 뒤늦게 도착해 아들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는 감격 이상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어서 설명하기 어려웠다. 별다른 말도 필요 없었다. 아내와 눈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미소 지어졌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어린 아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내와 신생아를 뒤로 하고, 출근하는 기차 안에서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복되다’고 재단했던 그녀의 병. 그 환자는 잘 살고 있을까? 그 환자의 부모는 지금 괜찮은 삶을 누리고 있을까? 복된 병이라니.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세상에 복된 병이 얼마나 될까? 듣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 자식이 앞으로 수 십 년의 긴 세월을 멍청한 눈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수개월을 눈물로 지새웠는데, 내가 죽으면 이 녀석이 혼자 잘 살 수 있을지 너무 걱정되는데······. 거기에 대고 복된 병이라니!’ 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은 어찌 보면 내 말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 다가올 힘든 날들을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만일 내 말이 옳다고 동의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면······. 바뀌어 버린 일상, 주위의 동정 어린 시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포기를, 앞으로는 무기력하게 받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다면······. 그때는 그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으로 복잡한 내 곁으로, 누런 논두렁이 길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창 밖을 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여 혼자 말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다시 만나면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 것 같네요.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