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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와이 Apr 20. 2019

중환자실에서의 은밀한 만남

사람목숨은 생각보다 질기다. 그리고 사람의 욕망 또한 그렇다.



 당연한 말이지만, 중환자실에는 목숨이 위태한 환자가 온다. 목숨은 질긴 것이다. 젊다면 가중치를 얹어도 된다. 젊은 사람은 잘 죽지 않는다. 중환자실에 오는 이는 대부분 노인들이다. 가끔 중환자실의 문을 두드리는 젊은 환자가 있다. 노인들은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약한 이들이니 별 해드릴 게 없어도 그냥 좀 지켜보고 싶으면 중환자실 들어오게 하지만, 젊은 사람 입원의 의미는 좀 다르다. 그에게 목에 칼을 겨누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40대 초반의 젊은 남자 환자였다. 죽음의 외줄을 타고 중환자실로 실려 들어왔을 때, 그를 살리느라 밤새 기울인 노력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알코올 중독자. 밥도 안 먹고 술만 몇 달 마셨고 간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간경화다. 심하게 진행되면 전신을 도는 피가 간으로 가지 못해 이곳저곳으로 우회로를 낸다. 많은 경우 그 경로는 식도이다. 이를 식도정맥류라고 한다. 전신을 도는 혈액이니 당연히 엄청난 양이고, 여차하면 식도정맥을 터뜨리고 뿜어져 나온다. 식도정맥류 출혈은 초응급이다. 실혈의 양에 따라 피 없는 사람이 되어 죽을 수도 있다. 수혈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전혈의 삼투압은 식염수보다 월등히 높다. 때려 붓는 대로 심장의 노동이 증가하고, 늘어나는 혈장량이 가진 압력에 출혈을 더 조장할 수도 있다. 유일한 방법은 터져버린 강둑을 미약하게나마 막아보는 것인데, 이 역시 즉시 시행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간경화로 식도정맥류 출혈이 생긴 이 사람, 피를 다 잃고 죽을 수도 있었다


 이 사람의 경우도 그랬다. 술을 먹다가 서양 전설의 용처럼 피를 불처럼 뿜어댄 이후 정신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왔다. 실혈량이 상당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무턱대로 수혈할 수는 없었다. 식도 어딘가에 정맥이 불뚝 솟아 있다가 터져 뿜어져 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내시경 시술로 터진 정맥을 묶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 시간, 시술자와 그의 팀을 바로 소집하기까지 시간을 필요했다. 나는 SB튜브 (Sengstaken–Blakemore tube)를 넣기로 결정했다. 이는 환자의 입 안으로, 식도를 거쳐 위 안까지 집어넣고 부풀리는 튜브다. 튜브는 식도 쪽은 긴 풍선, 위 쪽은 둥근 풍선 둘로 나뉘어 있다. 튜브가 부풀면 위 들문 아래로 턱 걸리게 되고, 그 위 쪽으로 긴 풍선이 식도 출혈부위를 전반적으로 막아주게 된다. 풍선 압박이 성공적이라면 고정되어 있을 것, 이제는 식도정맥으로 가는 혈류를 줄여주기 위해 누운 환자를 매다는 식으로 위에서 당긴다. 1kg 정도의 적은 힘으로 당기지만 상체가 약간 들려 매달린 환자를 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무너진 인간성이 느껴져 기분이 영 좋질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뭐 대수겠는가? 살 수만 있다면 내 기분 따위.


 나는 헤모글로빈 수치를 맞추기 위해 수혈 속도를 계산하고, SB 튜브 고정각을 맞추고,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내시경을 하고, 이후 피검사 결과를 보느라 새벽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노력 덕인지 그는 그렇게 살아났다. '다행이다!' 내 노력에 그가 응했다는 생각이 들어, 살아난 그의 모습이 기뻤다.





 "으이그. 첨에 어땠는지 기억나기는 해요?"

 "아뇨, 선생님.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정말 그 정도로 안 좋았습니까? 믿기지가 않는데요."

 "그래요. 이젠 술 끊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을 탈 겁니까."

 "이젠 정말, 정말 끊어 봐야죠. 또 술 마시면 내가 진짜 미친놈입니다. 이게 말이죠, 원래 처음부터 먹으려고 한 게 아닙니다. 사실 꽤 오래 끊었단 말이에요. 아! 아닌가? 아무튼 요즘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안 먹을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실려올 때만 해도 정신이 완전히 나가 있어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환자는 다소 수다스러웠다. 업무가 바빠 잡담을 할 시간이 없었지만 정신이 돌아와 떠드는 모습이 만족스러워 나는 약간의 오전 바쁜 시간을 할애했다. 살아난 것은 당연하고 전반적인 상태가 좋아질 게 확실해 보였다.


 중환자실에는 오전과 오후 30분씩 면회시간이 있다. 당연히 주위 침대에 많은 면회객들이 다녀갔으나 그는 입원 첫날 내내 혼자 있었다. 이유를 알아봤더니 가족이 없었다. 많은 술꾼들이 그렇듯, 그 역시 주변인들에게 많은 고통을 줬고 모두가 그를 떠났다. 오후 면회 때는 친구라는 사람들이 몇 찾아왔다. 그래도 제 정신일 때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고는 지내는 듯 보였다. 이런 심한 간경화 환자는 보통 예후가 나쁘지만, 친구와도 알고 지내고 하는 인간관계가 있다면 좀 낫다. 가까운 사람들이 금주를 돕는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있다.


 곧 일반병실로 올라갈 것을 계획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밤부터였다. 나는 당직을 서고 있었고 간호사들이 급하게 내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이 사람 진전 섬망 같아요! 빨리 와 봐요!"


 진전 섬망(Delirium tremens)은 중한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줄이거나 끊으면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환자의 경우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전반적 정신불안이나 환시, 환청, 방향감각 상실, 자율신경계 이상 등으로 소리를 지르고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환각을 느끼는 등 얼핏 미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는 증세다. 나는 당직실 침대에서 튀어나와 대충 가운을 걸치고 중환자실로 뛰었다. 과연 환자는 눈을 꾹 감고 몸을 뒤틀고 양 팔을 공중으로 휘휘 젓고 있었다. 가끔씩은 신음 섞인 동물적 소리도 내는 걸 보면 조절해야 할 증상으로 보였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진단이 명확히 떨어지지 않았다. 진전 섬망에서 흔히 보이는 손떨림도 없었고, 일단 날짜가 안 맞았다. 환자는 입원 직전까지도 술을 마셨다고 했다. 이를 감안한다면 진전 섬망치곤 너무 빨리 나타난 것이다. 간성혼수도 고려해 봤지만 이 역시 애매했다. 임상적으로 판단이 잘 안 서자 피검사를 나가 보았다. 깨끗했다. 나는 갑자기 발생한 정신 변화에 대체 원인이 뭔지 고민에 빠졌다.


 다행히 환자는 곧 안정을 되찾았고, 약간의 조치로 섬망 증세는 사라졌다. 나는 다음 날로 고민을 넘기고 다시 잠에 들었다.





- 의뢰내용: 알코올 금단으로 인한 섬망
- 수신과: 정신건강의학과 / 의뢰과: 소화기 내과

협진: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상기 40세 남환 만성 알코올 중독, 위식도 정맥류로 본과 입원 치료하고 있는 자로, 3개월 전부터 2일에 1회 막걸리 1병씩 마시는 음주행위 있었습니다. 본과적으로 토혈 있어 위식도정맥류 출혈 진단하 내시경적 결찰술 시행하고 중환자실에서 경과 보고 있습니다.
 어제 양 팔을 뒤흔들고 몸을 꼬는 행태를 보이는 섬망 증세 있었고, 로라제팜 0.5 앰플 정맥 정주 이후 곧 안정화되었습니다. 연 2일간 유독 밤에만 섬망 발생하고 있고 낮 동안에는 의식 또렷합니다. 임상적으로 진전 섬망보다는 내과적 컨디션 저하로 인한 섬망으로 판단하고 로라제팜 정주는 중단하였습니다. 귀과적으로 적합한 치료계획에 대해 고견 구하고자 협진드립니다. 바쁘신 와중에 부디 고진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답신:
 의뢰 내용대로, 현재로서는 내과적 상태 악화로 인한 섬망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정신증상 호전을 위해서는 내과적 상태 호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나, 과민반응이나 불면 등이 심하다면 본과 약 투여를 고려하십시오. 팔리페리돈 3mg 자기 전 + 로라제팜 0.5mg 경구투여를 고려하실 수 있겠습니다. 또한 티아민 결핍이 있을 수 있으므로 보충해주십시오. 의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의뢰내용: 간질발작 의증
- 수신과: 신경과 / 의뢰과: 소화기 내과

협진: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상기 40세 남환 만성 알코올 중독자로 본과적으로 위식도정맥류 결찰술 시행 후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자입니다. 최근 3일간 야간에만 보이는 섬망 증세 있으나 정신과 답변상 진전 섬망 가능성은 떨어지고, 내과적으로도 컨디션 저하로 인한 섬망 가능성은 떨어져 보입니다. 간질발작 등 귀과적 원인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워 뇌파 검사 시행하였습니다. 귀과적 고견 구하고자 협진 드립니다. 고진 선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답신:
 당시 경련 있었다면 알코올 금단으로 인한 경련이겠으나, 뇌파에서는 경련이 있었던 증거 없습니다. 환자 면담하였는데 의식은 명료하나 다소 흐린 의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섬망 가능성에 대해서는 뇌의 구조적 문제를 감별하기 위해 뇌 MRI나 조영제 CT를 고려해 보십시오. 구조적 문제없고 뇌파 이상도 없는 알코올 금단으로 인한 경련이라면 항경련제를 지속적으로 투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5일째. 협진을 두 건이나 진행했는데 고민이 더 깊어졌다. 섬망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었다. 알코올 금단 섬망, 간질발작, 내과 컨디션 저하 모두 아니라면 대체 뭐가 원인일까.


 신경과에 경련과 관련한 협진을 보내기는 했지만 실상 경련 같은 몸짓도 아니었다. 너무 원인을 모르겠으니 써 본 서신이었다.  생각해 보면 권유받은 MRI나 CT는 비용 대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뜬금없이 뇌종양이나 출혈 등이 발견될 가능성도 낮아 결국 헛수고로 끝날 확률이 높았고, 더군다나 환자는 가족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환자는 양 팔을 공중으로 휘젓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로라제팜 정주 0.5 앰플 하죠." 원인도 모른 채 약을 쓰는 기분은 쓴 맛이 났다. 처음에는 호들갑을 떨던 간호사들도 이제는 대답 없이 주사기를 들고 환자를 향해 타박타박 걸어갔다. 환자가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모두가 힘든 것을 넘어 지쳐 있었다. 원인 하나 밝히질 못하는 주치의(나)에 대한 원망도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이 상황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잘 보니 환자 옆에 1.5리터짜리 투명한 페트병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몸 깊은 곳에서 짜증이 확 올라왔다. 간경화 환자는 수액의 양도 제한해야 한다. 몸의 제3의 공간으로 물이 줄줄 새 부종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을 마시는 것 역시 그랬다. 특히나 이 환자는 식도정맥 결찰술까지 한 환자였다. 저렇게 벌컥벌컥 마셔서 매듭이 풀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아니, 저 큰 페트병 뭡니까. 설마 물이에요? 볼륨 조절 중요한 거 몰라요?"

 "보호자가 주고 간 물 같은데요. 치울게요."

 "빨리 치워주세요."


 내 타박에 간호사도 기분이 언짢은 듯 보였다. 그녀는 찡그린 표정으로 환자에게로 걸어가 바퀴 달린 테이블에서 페트병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습관처럼 냄새를 맡아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짜증스러운 표정이 놀라움으로 경직됐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 져서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이거 소주인데요."


 모든 퍼즐이 풀렸다. 그간 환자는 알코올 금단 섬망도 경련도 아니고 단지 취해 있던 것이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과연 술이었다. 소주 본연의 소독약다운 냄새와, 환자의 입에서 섞여 나왔을 법한 균들이 버무려져 특유의 시큼함을 만들어 냈다. 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해 환자를 흘겨봤다. 하지만 그는 이런 내 마음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여전히 침대에 누워 양 팔을 휘젓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환자를 취조하듯 다그쳤다. 환자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술병은 환자의 부탁으로 친구가 몰래 반입했다고 했다. 나와 다른 의료진은 그것도 모르고 힘들게 다른 원인만 뒤졌으니, 사실을 알고 난 뒤의 허무감과 실망감은 상당했다. 환자는 규정을 어겼고, 당장 퇴원수속을 밟아야 했다.


 나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환자 안에 은밀히 '어떤 병'이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고, 비밀스러운 병을 내 언어로, 내 진단명으로 규정해 치료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렵게 쓰인 내과 교과서 어느 한 페이지에 있을 법한 병태생리의 비밀을 쫓았지만, 실상 진실은 그의 욕망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의 욕구는 내과 교과서 어느 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여느 술꾼처럼 술을 원했을 뿐이었고, 다만 '이제 제가 술을 먹으면 미친놈'이라고 공언해 의료진을 안심시킨 다음 몰래 술을 반입할 정도로 강렬히 갈망했던 것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분노도 드는 한 편, 물질에 평생을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인생에 딱한 마음도 느꼈다. 당장 어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그 존재를, 잊지 못해 다시 찾는 그 욕망이 미련하면서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Photo by: Spencer Russel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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