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쌤 Jan 18. 2019

편견, 모른다는 것의 위험성

집단에 대한 집단의 집단혐오의 위험성

 요즘 6개월 째 주말마다 알바를 한다. 편의점이나 학원과 같은 무난한 알바가 아닌 다소 특이하다 생각할 수 있는 돌잔치 사회 알바를 계속 하고 있다.


 돌잔치 사회 알바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다문화가족, 외국인 가족 등등 평소 우리의 생활반경에서 자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돌잔치 행사를 하며 자주 만났다.  


 사실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는 그들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들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집단에 대한 선입견이 크게 작용했었다.


 하지만 실제 미팅을 진행해보고 행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기존 가졌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인종, 문화 등이 달라도 그들은 모두 아이의 부모님이라는 사실은 같았다.


 돌잔치 사회 알바를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무엇이 사람들 간의 차이를 만드는 가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


 "물론 문화와 인종의 차이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개개인의 성격차이가 더 중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전히 개개인의 관점보다 전체 집단적 관점을 크게 고려해서 혐오를 하는 경향이 많다.


 최근 한국사회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그들이 속해있는 집단으로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난민’, ‘일본’, ‘보수’, ‘진보’. ‘페미니즘’, ‘종교’, ‘직군’ 등으로 개개인들을 분류한 후 이를 기반으로 선악을 판단한다.


 보편적 특징으로 개개인들을 묶고 판단하는 것은 편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는 집단에 대한 집단의 혐오가 조성되기 쉬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오류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개개인의 사람을 평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집단으로 묶는 것이기에 같은 실수는 반복되며 심화된다


 그 결과 난민을 다 같은 다 같은 난민으로, 보수를 다 같은 보수로, 진보를 다 같은 진보로 여긴다. 그러며 집단에 대한 혐오를 이어나간다.


 혐오의 과정에서 임의로 설정한 집단 중 일부 극단적 모습을 집단 전체에게 덮어씌운다. 자신의 집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그러한 방식으로 매도하며 혐오한다.


 이는  전체 공동체의 화합에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또 외부의 적이 사라진다고 하더라고 과연 내부의 영구적인 화합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필연적으로 새로운 외부의 적을 설정하거나 집단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혐오사회가 반복되는 비극적 악순환의 구조이다.


 어느 집단이던 극단적인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구성원을 이로 매도할 수는 없다. 자신의 집단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가? 개개인으로 전체 집단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경솔하고 위험하다.


 공동체의 화합을 해치는 개인들에게는 당연히 제제가 있어야한다. 하지만 그 제제가 개개인 및 이성적 영역을 벗어나 집단에 대한 감정적 혐오로 흘러가면 매우 위험하다.


 다른 집단이라 하더라고 그들을 다 같은 공동체 속의 개인으로 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혐오사회를 벗어난 바른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곡된 혐오가 돈이 되는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