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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쌤 Nov 05. 2018

글이 써지지 않는 날, 지하철

이야기꾼과 광대 그 둘의 차이.

 글이 써지지 않는 아침이었는데, 글을 쓰고 싶었다. 늦잠을 자서 바로 눈앞에서 놓친 버스, 코앞으로온 지하철출발 시간때문에 못먹은 아침등의 소재들.


 글을 쓰고 지우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글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 느낌이 딱 내가 수업들으러 가는 월요일 아침 10시 노교수의 윤리수업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몸만 출석해서 출석체크만 하고 영혼은 가출해버리는 그런 수업, 브런치를 열고 글을 쓰려한 나의 상황이 딱 그랬다.


 생각해보면 오늘 아침 단체 카톡방은 꽤 시끄러웠다. 한쪽은 마미손이 새로 발표한 광고음악때문에, 다른 한쪽은 특정사람 때문에.


 마미손은 재밌다. 속이려는 사람은 있는데 아무도 속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놀이판에서 속는사람과 속이는 사람 모두 즐긴다.


 마미손을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않는다. 특유의 딕션, 때려박는 랩톤, 가끔 김구안경을 쓴 모습에서 나오는 비주얼 이 모든 것이 한명으로 수렴된다.


 그럼에도 마미손은 자신의 복면을 강조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람들도 마미손의 복면보다 그속에서 그 가수가 추구하는 가치를 유추하며 즐긴다. 마미손의 복면은 수단일뿐 본질은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다르다. 그는 로스쿨생, 종교인, 서울대졸업생이라는 자신을 둘러싼 복면을 강조한다. 복면안에 숨어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복면안에서 그는 나르시즘에 빠져있다. 자신의 말은 진리고, 늘 옳고,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공격하는 악당이다. 자신은 늘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의 놀이판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를 강조하지않느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대신하는 복면이 흥미로울 뿐이다. 그의 복면은 그 주체보다 강하다. 그의 존재는 복면에 가려 그렇게 타자화되어버렸다.


 자신의 정체를 복면에 가리며 놀이판을 펼친다는 점에서 마미손과 그 사람은 비슷하다. 그의 주변에서 추종자들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환호는 역설적이다. 누군가를 앞으로 나가게 밀 수도, 벼랑끝에서 밀어버릴 수도 있다. 복면안의 스스로에 대한 명확한 이해없이 환호에 취해버리다면 결국 비극이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똑같이 복면을 썼다하더라도 놀이판에서 판을 이끄는 이야기꾼이 되는 것과 남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복면만을 강조하는 광대가 되는건 한끝차이이다.


 마미손의 노래 소년점프에는 '우주는 겁나게 크고 난 우주의 조빱'이라는 가사가 있다. 정처없이 놀이판에서 광대놀음하다 복면을 자신으로 착각하고 과신해서 스스로를 잃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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