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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새해에 있었던 일

안녕, 나의 가시나

by 분더비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새해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기분 좋은 하루였다. 좋아하는 공연을 낮과 밤 연달아 봤고, 길을 걸을 때마다 상쾌한 기분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좋아하는 유부초밥을 한입에 우물우물 넣으며 연신 행복해 하기도 했다. 나의 할머니 구 여사의 부고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여자라는 이유로 어려서 글을 배우지 못한 구 여사는 머리가 새하얗게 된 할머니가 되어서야 뒤늦게 글을 배웠다. 어려서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공부를 늙어서 하려니 구 여사는 매번 온몸이 쑤셨다. 매일 배우고 또 배워도, 내일이면 더 많은 걸 까먹었다. 재미도 없는 공부 대신 화투나 치러 가자며 다른 할머니들을 꼬시기도 했다. 엄마나 이모를 통해 구 여사의 일화를 전해 들을 때면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귀엽고 우스워서 매번 작은 웃음이 배시시 나왔다.


늦깎이 학생이 된 구 여사의 집에는 그녀가 노치원에서 만들어온 것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초등학생이 미술 시간에 만들었을 법한 조악하지만 귀여운 것들이 잔뜩이었다. 그중 내 눈을 사로 잡은 건 크레파스로 튤립이 알록달록 그려진 합판 화분 그림이었다. 행복하세요라는 글씨가 삐뚤 빼뚤 적혀 있는.


튤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튤립은 낮이면 꽃잎을 활짝 열고, 해가 진 뒤엔 추운 밤에는 봉오리를 굳게 닫는다. 튤립은 온도와 계절에 따라 유연하게 살아갈 줄 아는 꽃이라서, 활짝 피지 않은 모습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꽃이라서 나는 매번 마음을 빼앗겼다. 조신하게 오므린 상태의 튤립을 훨씬 좋아하는 탓에 그림 튤립을 더 좋아하는 나는 이미 직접 그린 튤립 캔버스와 선물 받은 튤립 조명이 있는데도, 그 그림을 보자마자 작은 욕심이 솟았다.


할머니, 나 이거 줘. 나 가져갈래.

그림 속에 엉성하게 쓰인 글씨가 나의 구 여사가 쓴 글씨가 맞을지, 아니면 옆자리 할머니나 선생님에게 써달라고 부탁했을지는 영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걸 보자마자 이게 꼭 구 여사가 나에게 준 소중한 유산이자 유일한 가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구 여사가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남긴 다섯 글자. 구 여사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집에 오는 길, 작은 그림을 품에 소중히 안고 몇 번이고 그 글씨를 어루만졌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은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시를 쓰고 글을 짓는 할머니들의 순수함이 선명하게 빛나는 영화다. 할머니들이 글을 배우고 시를 쓰는 작고 소박한 이야기일 뿐인데도, 그 안에서 묵직하게 흐르는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것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애늙은이처럼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했던 영화였다.


나는 늘 나의 구 여사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구 여사가 가장 창피했던 적은 언제였는지, 글을 배우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었는지,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날이 갈수록 구 여사는 점점 더 늙었고, 우리의 대화는 점점 더 어려져만 갔다. 깊어질 수 없는 대화가 아쉬울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꺼내 보며 대신 구 여사의 마음을 상상했다.


이 영화는 내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라는 이름의 뮤지컬로 무대에 오른다. 좋아하는 원작이 공연화된다는 소식은 늘 반갑다. 무대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야기를 더 추억하고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 여사의 빈 자리를 갈수록 더 느끼며 헛헛하고 외로운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지금인지라 왠지 더 은근한 위안과 위로가 된다. 나의 구 여사를 더욱 선명하게 그리워하고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줄 것만 같아서.


글공부를 하던 구 여사의 마음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우리가 차마 나누지 못한 대화들을 상상하며,

나만의 방식, 나만의 시선으로 구 여사를 가득 그리워할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


느린 걸음과 깊은 주름 너머 아름다운 시로 기억될 나의 가시나를 부단히 그리워해야지.


슬프고 추운 마음들이 불쑥 찾아오더라도,

까만 밤의 튤립처럼 아름답고 유연하게 이 마음을 잘 토닥여야지.


당신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넨 '행복'을 기억하며

더욱 씩씩하게 남은 생을 잘 이어 받아야지.


안녕, 나의 가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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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더비니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wunderbin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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