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틱틱붐을 보내며
3년째 서른의 끈을 놓지 못했다.
또래보다 학교를 빨리 가서 친구들보다 서른을 한 번 더 맞이했다가,
또 생년월일에 맞춰 진짜 서른이 되었다가,
또 나라에서 그냥 젊게 살라고 한 번 더 준 만 나이의 기회 덕분에 서른을 연장했다.
꼭 ‘서른_최종’, ‘서른_최최종’ 을 거쳐 ‘서른_진짜_최종_final’에 접어든 기분이었다.
그만큼 아홉수도 남들보다 많이 겪었다.
이유 없이 길바닥에 쓰러졌다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크게 아팠다. 매일 밤 예고 없이 기습하는 고통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주사 바늘에 온몸이 찔리기도 했고, 처음부터 다시 걷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두 발로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실은 엄청난 근육이 요하는 일이라는 걸, 자립自立이란 그 자체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홉수 혹은 서른 즈음에 새삼 느꼈다.
그렇게 생활 반경은 점차 좁아졌고, 좁아진 만큼 자주 우울해졌다.
그런 내가 불쌍해 보였던 건지,
누워서 재밌는 영화라도 잘 챙겨보라는 건지 동생은 생일 선물이랍시고 큰 턱을 냈다.
하지만 태블릿을 잘 다루는 얼리어답터는 아니었던 터라 아이패드는 꽤 오랜 시간 방구석에 내팽개쳐 있었다.
아이패드가 외롭게 내팽겨쳐 있는 동안
아팠던 나날도 지나 건강을 되찾았고, 차차 삶을 대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20대 초반의 내가 남들보다 바쁘고 빠르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면, 20대 후반의 나는 그런 강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돈이나 명예보다는 나 자신의 행복이 더 중요했고, 숨통 트이는 일상과 여유가 더 중요했다.
남들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갉아 먹는 대신,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기억하며 미래 대신 현재를 택했다.
그런 선택이 과연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는 알 수 없지만, 자꾸만 엄습하는 불안과 걱정으로부터 나를 다독이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의 행복의 과정을 열심히 기록해 두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패드는 제 쓸모를 찾았다.
네 나이에 연봉 이 정도는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대책 없이 퇴사해도 되는 거야?
사회적 잣대가 정해둔 수많은 지탄을 애써 무시하며
내 자신의 행복에만 집중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선택한 길인데도 때때로 철 없는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고,
또 정말 이렇게 지내도 되나 여러 밤 마음을 번복하고 방황했다.
그러던 중 영화 틱틱붐을 봤다.
틱틱붐은 서른을 앞둔 뮤지컬 작곡가 조나단 라슨의 삶을 다룬 영화다. 집도, 직장도, 차도, 와이프도, 애도 없는 조나단은 서른이 되기 전 마지막 생일을 앞두고 예술가로서의 재기를 꿈꾸며 치열한 뮤지컬 워크숍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다.
여자 친구와의 결별, 친구의 죽음, 곡을 빨리 써내려 가야 한다는 중압감, 자존심과의 싸움 등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비참하게 싸우며 온갖 소란 끝에 겨우 완성한 뮤지컬 워크숍. 많지도 적지도 않은 관객들의 칭찬과 격려 속에서 그는 그토록 꿈꿔왔던 자신의 꿈을 펼친다.
큰 박수 갈채 속에서 워크샵은 끝났지만, 조나단의 세상은 그리 크게 바뀌진 않는다. 쇄도하는 제작사들의 러브콜은커녕 워크숍 이전과 이후 조나단의 삶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인생이 한 방처럼 바뀔 줄 알고 크게 상심한 조나단에게, 나이가 지긋한 그의 에이전트 로자는 말한다.
그저 그대로 쓰라고. 늘 그랬던 것처럼 계속 쓰면 된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전히 고민하고 걱정하는 서른날의 나에게 그녀의 말은 뾰족하고 날렵하게 남았다.
현재를 택하겠다고 다짐해놓고도 은근한 조바심으로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내게,
지금의 행복에 최선을 다 하면 언젠가는 쨍 하고 해뜰 날이 올 거라고 어렴풋 상상하는 내게,
세상을 더 오래 살아온 로자의 말은 명료하고 분명하게 다가온다.
걱정이나 불안은 잠시 내려놓고, 동시에 또 너무 큰 망상과 기대는 접어두고,
그저 어제든 내일이든 똑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나아가라는 그 조언.
지난 가을, 뮤지컬 틱틱붐이 개막했다. 한동안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극이라 기대감이 크기도 했지만, 배두훈 배우의 캐스팅 소식 역시 반가움을 더했다. 배두훈 배우를 처음 본 건 8년 전 뮤지컬 빨래에서였다. 당시 배우의 나이는 만 서른이었고, 당시의 나는 세상이 무섭고 두려울 때마다 극장을 찾던 스물 언저리의 관객이었다. 극장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응원과 격려를 받던 스물 언저리의 나는, 시간이 흘러서도 여전히 극장에서 매번 기운을 차리는 서른 언저리의 관객이 됐다.
서른의 배우와 서른의 배우를 바라보던 관객,
서른을 연기하는 배우와 어느 덧 서른이 된 관객.
이토록 반가운 우연과 여전한 만남에 공연 개막 전부터 왠지 모를 위안을 크게 얻었다.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뮤지컬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뮤지컬.
나는 이 이야기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이야기라서 좋았다.
너무 장엄하고 거대해서
오히려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마주하게 하는 그런 이야기라서.
투박하고 낡은 일기장에 써 내려간 나의 간절한 마음에 귀 기울이게 하는 그런 이야기라서.
언젠가 회사 대리님이 말했다.
보통 학부모들은
자기 애들이 학예회나 시합에 나갈 때마다
‘떨지 마!’, ‘긴장하지 마’ 라고 말하곤 하잖아요.
근데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대요.
’응, 그거 떨리는 일이야’
‘원래 무대는 떨리는 곳이야, 떨어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거래요.
틱틱붐은 온갖 불안에 대해 얘기하는 극이다.
서른을 앞두고 예술가로서 성공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조나단 라슨을 포함한 극중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불안을 쥐고 흐르는 시간을 버티고 또 견디며 살아간다.
나는 이 극이 불안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불안을 포착한 극이라서 좋았다. 극중 노래인 Louder than words는 가사 원문은 이렇다. Don't say the answer.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그래 어쩌면 불안은
애초에 대꾸해야 할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매일 밤 쓰고 또 지우며
시간을 까먹을 필요가 없는 놈일지도 몰라.
돌이켜보면 불안과 걱정은 삶의 양면처럼 늘 공존했다. 숨 돌릴 새 없이 바쁠 때도, 내 삶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평온한 시간에도, 다양한 모양의 불안은 삶의 틈을 기어코 비집고 찾아왔다. 실망과 두려움, 불안과 고통이 숙명적으로 늘 함께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이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비록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아프더라도, 어쩌면 삶을 나아가게 하는 자양분은 불안에서부터 오는 건지도 모르니까. 어떤 형태의 삶이든 불안은 나와 늘 함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멋지게 불안과 싸우지 않는 조나단의 모습은, 그저 순간을 살피고 지금을 보듬으며 나아가겠다는 조나단의 심심하지만 대담한 선택은 그렇게 삶을 살겠노라 다짐한 나에게 큰 위로와 다짐을 남겼다. 많이 아팠던 날들도 있겠지만, 이내 곧 씩씩해지는 나날도 찾아오겠지. 지나온 세월 속에서 배웠던 교훈들을 기억하고, 갖은 싸움 끝에 남은 상처들을 돌보고, 그렇게 새롭게 마음을 추스리며 살아가야지. 어제보다, 오늘을 한 뼘 더 씩씩하게 살아봐야지.
조나단 라슨이 남긴 선율을 흥얼거리며,
오늘도 오늘의 하루를 부단히 그리고 기록한다.
그래 참 멋진 하루였구나!
하고 오늘을 기억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