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베르 카뮈 <이방인>
나는 카뮈의 글쓰기가 카프카의 글쓰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깊은 명암의 대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회색빛 얼굴, 그리고 저벅저벅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나는 뫼르소가 카프카의 K를 닮았고, 다자이 오사무의 요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답지 않았던 K와 인간임을 실격당한 요조의 세계. 그들의 얼굴 너머에는 늘 차갑고 외로운 공기가 두둥실 떠다녔다. 나는 뫼르소 역시, 그런 표정과 그런 눈빛을 지닌 사람이 아닐까, 하고 머릿속에 그를 그렸다.
카뮈는 <이방인>을 희곡으로 만들고 싶다는 누군가의 요청에 이렇게 답한다. 자신의 것은 카프카의 것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라며 '카프카식의 어두침침하고 현실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카뮈의 말대로라면, 카프카의 이야기는 비현실의 이야기고, <이방인>은 현실의 이야기다. 카프카의 이야기는 어두침침한 것이고, <이방인>은 어두침침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카프카와 카뮈는 분명 다른 결을 지닌 작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책의 첫 장부터 끝까지, 나는 카프카를 연상하며 이방인과 재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카프카의 것도, 이방인의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것을 닮았다 여겼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카뮈의 '다르다'는 문장을 읽은 뒤에는, 그렇다면 카프카와 카뮈의 차이를 비교하고자 했다. 하지만 역시나 어려웠다. 두 개의 것이 서로 다르다는 명제의 답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뜻 뾰족한 근거를 둘러대지 못했다. 나는 이전에 알던 카프카와 까뮈를 고새 잊었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그들을 몰랐는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선택은 그들을 제대로 알 때까지 집요하게 공부하던가, 아니면 무지와 상실의 덧없는 반복을 인정하고 그들을 알기를 포기하던가. 둘 중 하나다.
엄마가 오늘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의 짧고 강렬한 첫 구절. 나는 이 구절을 몇 번이고 소리 내 읽었다. 천천히 글자를 뜯어내듯 읽어보기도 하고, 목구멍에서 뜨겁게 읊조려도 보고, 들끓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을 담아 뱉어보기도 했다. 나의 소리를 녹음한 뒤, 몇 번씩 되감아 듣기도 했다. << 엄마가 / 죽었다. V 아니 V 어쩌면 / 어제 >> 환청처럼 들려오는 뫼르소의 목소리를 지워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환청은 연극 <이방인> 속 뫼르소를 연기한 배우의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산울림소극장, 이방인, 2017) 하지만 그건 배우의 목소리라기 보다는 진짜 뫼르소의 아우라에 더 가까웠다. 소설의 모든 흐름은 뫼르소의 시선으로부터, 오직 뫼르소의 시선만으로 흐른다. 때문에 이야기는 무척이나 독립적이며 주관적이다. 누군가의 일기를 보는 것은 때때로 괴롭다. 뫼르소의 또렷한 인상만큼 또렷한 문장의 호흡과 내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엄마가, 오늘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나는 결국 그의 목소리를 지워내지 못한다.
그는 방황하지만, 절대 방황하지 않는다. 그는 매 순간 무언가를 느끼지만, 결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뫼르소는 늘 건조하고 투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온기 없는 그의 목소리는 정직하다. 그에게 엄마의 죽음은 엄마의 죽음일 뿐이다. 그에게 마리는 그저 마리일 뿐이다. 그의 감정의 요동치는 법이 없다. 다만, 아주 미세하고 조용하게 그의 시선 사이를 통과해 갈 뿐. 정직한 그의 목소리는 죄가 없다.
그에게 오직 존재하는 것은 순간의 욕망뿐일 것이다. 이를테면 여인의 다리를 보며 느끼는 정욕,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오는 수면욕, 맛있는 걸 먹고 즐기는 소박한 식욕 따위가 그 예다. '고결'이나 '권위'의 척도로 포장될 수 없는 이 모든 욕망은,뫼르소를 포함한 모든 인간 삶을 지탱한다. 각각의 의미나 가치 없이도 그들은 살아 숨 쉰다. 죽음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크고 작은 욕망처럼 죽음 역시 인간 모두가 가진 태고적 숙명이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으로 끝난다. 다만 인간은 때를 알 수 없이 죽기 때문에, 거의 대개의 죽음은 각각의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남기지 못한다. 삶이란 끝이 언제인지를 알 수 없는 생生과, 분명히 존재하나 존재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사死가 얽힌 것이다.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며, 누구에게나 공통된 욕망과 죽음. 허나 죽음에 이입되는 인간의 감정은, 그것이 익숙해질 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꽤 낯설다. 공포스럽고, 침울하고, 소란스러우며 극적이다. 죽음은 늘 섬광처럼 반짝이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 가슴에 꽂힌다.
엄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그리고 뫼르소 저 자신의 죽음. 연달아 이어지는 세 개의 죽음은 <이방인>의 세계에 반짝이는 총탄을 던진다. 혼란스러울 것 없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침착하고 잔잔하던 바다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난다. 나에게도, 뫼르소에게도, 뫼르소를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도, 세상의 상像은 어지럽게 어그러진다.
수많은 눈으로 다양하게 정의되는 <이방인>의 세계는 정직하고 촘촘하다. 어떤 기준을 들어 파헤쳐도, <이방인>은 대립한 두 세계를 똑똑하게 내보인다. 그리고 그 다양한 세계관 속에 바탕된 전제는 단연 '허무'에 관한 게 아닐까. <이방인> 속 대명제는 '인간의 감정이, 혹은 인간의 세계가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하고 사회적인가' 라는 공통된 주장 혹은 질문이다.
나는 문득, 내가 '허무', '공허'라는 단어와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같은 문장 안에 고민 없이 배치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절대 앞 선 단어들과 등가 관계가 되지 못할 '사회적'이라는 단어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봄 직하다. <이방인>이 은유한 세 단어의 융화는 무엇으로부터 왔는가. 그 화목한 조화는 과연 정다운 것인가. 아니 어쩌면, '정다움'의 가치는 사실 그 어떤 의미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덧없는 것인가. 사회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하면서도 필사적인 것인지, 나는 각각의 체험과 개별적 경험을 통해 증명한다. 그리고는 증명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다시 사회적 활동이 수없이 운동하는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근원적 허무를 발견하려 해도, 결코 끝내 발견할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방인>을 읽는다는 것은, 곧 주변의 덧없음을 거둬내는 시도이자 덧없음을 거둬낼 수 없음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마치 인간이 죽음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를 증명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는 나로부터 낯설다. 너는 너로부터 낯설다. 그럼에도 너와 나는 '낯섦'을 정의하고, 규정하고, 경계를 만든다. 낯섦과 낯섦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곳에서, 이를 딛고 살아간다는 것(혹은 딛었다고 믿는 것)은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낯섦은 결코 극복되거나 친숙해지거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무지의 상태로 이 삶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뫼르소가 제 죽음 앞에 환희의 감정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 허무의 반복을 끝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허무한 이 세계를 벗어나 저 너머의 새로운 차원에 가닿을 수 있으리라는 그런 믿음. 때문에 죽음을 마주한 그는 희망적이다. 자유롭다. 행복하다. 두려울 것이 없다.
그의 인간답지 않은 인간다움이 부러웠다. 조금 다른 맥락이나, 관조적인 삶 덕분에 쉬이 흔들리지 않았을 그의 날들이 부러웠다. 한때 뫼르소가 넋을 놓고 바라봤을 어느 순간의 태양이, 여전히 지금, 여기의 시간을 관통한다. 변함없이 뜨겁고, 찬란하게. 다만 이미 균열이 간 세상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