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인식] 새벽 시간, 몸이 가르쳐 준 여유

by 박웅

깊은 밤,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정신이 번쩍 들어 침대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집었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였다.

“아빠, 뭐 하쇼?”

익숙한 장난기. 어린 시절에도, 성인이 된 지금도 변함없다.


“자려고. 엄마도 주무셔.”

“벌써? 아, 미안해. 주무세요. 사랑해.”

“그래. 아빠도.”

짧은 통화가 끝나고, 화면이 꺼지자 방 안이 다시 어두워졌다. 잠시 누워 있다가 나도 모르게 웃었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누워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술 한 잔, 야식, 늦은 드라마 — 별것 아닌 습관들이 밤을 길게 늘여놓곤 했다. 결과는 늘 같았다. 피곤한 아침, 후회로 시작되는 하루.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어느 날부터인가, 열 시만 넘으면 몸이 먼저 침대로 나를 이끈다. 억지로 잠들려 하지 않아도 금세 잠이 든다. 그리고 아침 여섯 시,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어떤 날은 다섯 시, 알람도 필요 없다. 몸이 스스로 말한다.

“이제 깰 시간이야.”


그때부터의 하루는 완전히 달라졌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커피를 내린다.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고, 필터 위로 퍼지는 향이 방 안을 채운다. 손끝에 닿는 잔의 온기, 공기를 가르는 커피 향, 그 모든 게 아직 잠든 세상과 다른 호흡으로 움직인다.


리클라이너에 기대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단지의 정원은 아직 어둠 속에 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잔디가 희미하게 젖어 있고, 분수대는 물이 멈춘 채 고요하다. 그러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푸르게 번지기 시작한다. 하루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생각한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지만, 몸의 리듬이 달라지면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젊을 땐 에너지가 넘쳤지만, 늘 조급했다. 그때의 나는 잠을 줄이는 걸 ‘열정’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몸이 먼저 알려준다. 조금 더 일찍 눕고,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조용히 나를 살피라고.


쌓이는 세월은 그렇게 시간의 쓰임을 바꿔 놓는다. 분주하던 밤이 평온한 새벽으로, 놓치던 여유가 다시 삶에 스며들고, 나는 오늘도 새벽의 고요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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