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공기가 차가웠다. 며칠째 뻐근하던 허리를 풀 겸, 집 근처 사우나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차를 두고 길 위에 나선 건 오랜만이었다. 한 걸음씩 내딛자, 익숙한 거리가 조금씩 낯설게 다가왔다.
가로등이 뜸한 골목으로 접어드니, 어둠이 천천히 몸을 감쌌다. 불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고요와 바람뿐이었다. 그때, 오래전의 공포가 그림자처럼 되살아났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 열지 말라던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멈춰 섰다. 삼베 수의를 입히는 어른들의 손, 정지된 공기, 그리고 방 안을 채운 낯선 정적. 그날 이후, 어둠은 내게 ‘죽음’과 같은 얼굴이었다. 밤이 되면 눈을 감기가 두려웠다. 죽는다는 건 깜깜한 구덩이에 떨어지는 일이라 믿었다.
“엄마, 죽지 마. 절대로…”
울먹이며 매달리던 나를, 엄마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엄마는 안 죽어. 괜찮아.”
그 말이 나를 지켜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두려움이 막을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었음을. 죽음은 생각보다 차갑지도, 끔찍하지도 않았다. 그건 삶이 다 써 내려간 한 페이지가 고요히 덮이는 순간일 뿐이었다.
철학자들이 말하던 ‘죽음의 부재’라는 문장이 그때 처음 마음으로 이해됐다. 살아 있을 땐 죽음이 없고, 죽음이 올 때 우리는 이미 없다. 그 단순한 진리가 내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이제 밤길은 더 이상 공포의 무대가 아니다. 불빛이 사라진 길 위에서 나는 오히려 편안하다. 세상의 소음이 가라앉고, 내 안의 생각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어둠은 사라짐이 아니라, 하루의 남은 온기를 지켜주는 포근한 이불 같다.
그 어둠 속에서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마흔여섯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는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 생각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을 조금 더 성실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남았다.
밤의 어둠은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다. 그건 내 삶의 또 다른 빛이다. 낮의 눈부심이 세상을 비춘다면, 밤의 어둠은 그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이제 두려움 대신 고요를, 결핍 대신 깊이를 본다. 빛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내 안으로 스며든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