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공간 그 자체로 말을 한다. 집이란 살아온 방식의 방증이자 살고 싶은 생활 방식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구조에서 비슷한 말을 하며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안정감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짓는다는 것.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이다.
<집의 일기>는 작가가 집을 짓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지어진 ‘내 집’에서 살아가는 나날을 사계절로 나누어 기록한 일기다. 내가 지은 집에서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며 성장하는 일을 기록했으니 <집의 일기>라는 제목은 빈틈없이 옳다.
70이 다 되도록 원하는 바를 제 힘껏 이루지 못하다 비로소 이룬 성취에 “해냈다!”라고 하는 부분이나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신기해하는 모습, 생의 기쁨을 흠뻑 만끽하는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든다. 중간중간 삽입된 소담스러운 사진 역시 그녀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박성희 작가의 목소리는 소녀의 싱그러움 그 자체다.
나는 결코 알 수 없는 가드닝 용어나 식물의 이름이 엄청나게 등장하는데, 이토록 식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풀 한 포기 절로 나지 않는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얼마나 괴롭고 두려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녀가 선택한 삶에는 자연이 8할이다. 최대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그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의지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유포리에 자리 잡은 그녀의 집은 노을 진 수평선처럼 자연 위에 떠 있는 듯 오히려 하나인 듯 그러하다. 그런 집에서 작가는 자연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 단순하고 가볍게,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눈 뜨면 밖으로 나가고 싶다. 오늘도 이어질 고된 하루가 기대된다.’ (p.62)
성공을 해야 한다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하는 부담 없이, 누군가를 건사할 필요 없이 오로지 내 몸 하나만으로 그저 밭을 일구고 집을 가꾸는 것. 때에 따라 심고 수확하고 지긋이 바라보는 삶. 복잡할 것 없이 단순함이 주는 행복. 그런 삶이 좋아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삶.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허무하지 않다는 작가의 말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언제라도 그런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
봄, 여름 내내 자연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이던 작가는 가을에 들어서자 불안과 초조를 실토한다. 가장 원하는 형태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형태의 삶을 그리워하고, 또 다른 형태를 갖춰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것. 쓸쓸한 계절이 오면 으레 낙엽이 지고 많은 생명이 고개를 떨구듯 마음도 자주 바닥을 내려다본다. 마음의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는 일은 자연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후 유포리에도 작가의 마음에도 다시 봄이 다가온다. 얼어 죽지 않고 꿋꿋이 다시 싹 틔울 준비를 하는 것들을 향해 작가는 전보다 더욱 상기된 톤으로 기대를 고백한다. 소멸에 가까운 처지에 초연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실은 삶에 집착하게 된다는 그녀의 솔직함은 경이로우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곧 다시 피어날 봄꽃들과 새잎들에 대한 기대가 마치 무사히 겨울을 넘기고 사라지지 않은 자기에 대한 안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희망차면서도 어딘가 애잔한, 아름답고 구슬픈, 생을 향한 그녀의 사랑.
하루의 기록들이 모인 책이다. 그러나 그 하루의 짧은 기록 안에 삶을 관통하는 말들이 있다. 아, 이것이 삶을 오래 살아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인가. 혹은 기필코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죽음의 모양을 선택한 자의 성찰인가 하여 하루하루, 한 장 한 장이 놀랍다. 유려하거나 대단치 않은 문장이면서도 그 의미만큼은 말할 수 없이 대단하다. 편집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런 문장마다 나름의 표시를 해두었다. 그 문장들을 그러모아 ‘박성희의 말’로 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의 마지막은 ‘장 담그던 날’이다. 장을 담근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 볕 좋고 푸른 하늘 아래 올해 장맛은 맑고 깊겠다는 작가의 말은 다시 또 살아가겠다는 다짐 아닐까. 이 산골에서 사계절을 다시.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