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가진 친구가 부럽다며 기르기 시작한 딸의 머리를 말리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저 뜨거운 바람!
아,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내 머리 말리기도 지긋지긋한데.
나조차도 하기 싫어서 시도 때도 없이 생략하는 사소하고 많은 일들을, 칠팔 년간 아이들을 위해 꾸역꾸역 해왔다. 이 정도면 인이 박힐 만도 하지 않나? 그 오랜 시간을 지나고도 ‘그러려니’ 체화시키지 못하고 속으로 토악질을 하는 나란 인간도 지겹다. 이 모든 시간이 징벌적 노동처럼 느껴진다.
유재석은 그랬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국민 MC의 말은 큰 울림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고 했지, 그냥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도대체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길래 하기 싫은 일을 이토록 매일매일 견뎌야 하는 걸까. 나한테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언가를 감내해야 하는 삶이 내게도 통용되는 것이 맞나?
아이가 태어난 뒤로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끊임없이 해야 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므로 책임져야 한다. 사랑이 부족하다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일 뿐, 사랑이라는 행위나 마음 상태를 열렬히 유지하고 싶어서, 그 열심히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 연예인은 술을 마시기 위해, 혹은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운동을 한다고 했다. 20대-30대 한동안은 나도 그럴 수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를 행위함으로써 내가 얻는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느 순간 막막할 만큼 알 수 없어졌다. 어떤 것이든 감수할 만큼의 ‘무엇’이 있는지, 그것부터 불분명해졌다. 고기가 좋아 육선아라는 별명을 가졌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고민이었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술이 좋았는지 취기가 좋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매번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공유하기 위해 온갖 귀찮음도 불사하던 나는.
아이들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궁금해한다. 그게 뭐야? 나도 해볼래. 나도 나도. 어른인 나는 응당 나의 욕망은 내려두고 그것이 순서이든 무엇이든 간에 양보를 해야 한다. 그러다 문득 부아가 치미는 그런 날에는 버럭 소리를 치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어른들의 양보가 당연한 건 아니야!"무엇이든 본인이 먼저인 게 당연한 듯 해맑게 요구하는 아이들의 ”나도 “라는 말이 때로는 내게 너무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이라 상처가 된다. 전부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잠시의 틈도 주지 않는 아이들이 야속하고 밉다. 어른 주제에. 사탕 뺏긴 아이처럼 악이나 쓰고 싶다니, 옹졸하다. 나 같은 인간은 부모가 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상처가 또 쌓인다.
우리 부모님도 그랬을까? 우리 부모님은 대체 무엇으로 버티고 견디며 나를 키우셨을까. 우리 부모들은 무슨 대단히 좋은 것이 있어서 이토록 무수한 날들을 가누며 살아오셨을까. 아니, 사실 그들도 별 것 없이 그냥 살아냈을 것이다. 특별한 각오나 숭고한 철학 같은 것과 무관하게 그저 매일이 왔고, 그 매일을 넘겼을 뿐. 가장 곁에 있는 나의 남편도 그렇게, 주어진 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덕분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대체 나는, 내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걸까.
사실 이 투정은 나만 하찮은 인간일 수 없다는 몸부림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요구에도 상처받고, 내 본능적인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는 현실에 부아가 치미는 알량한 영혼을 가진 부모가 비단 나뿐만은 아니어야 한다는 애원이다. 어른답게 꾹 참고, 사랑으로 포장하고, 감사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순간에 번번이 실패하는 또 다른 인간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안간힘이다.
그래서 당신의 미숙함도 들켜버리길 바라는 치졸한 마음을 고백한다. 당신도 가끔 아이들이 밉고, 이 모든 반복이 지겹고,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었으면 좋겠다. 당신 안에도 나처럼 비루한 마음이 숨겨져 있기를. 그래서 우리 모두가 조금은 덜 외롭기를.
*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