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덧칠

by 유선아


감정은 경험이자 학습이다. 마음을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난감한 점은, 이 명제를 머리로는 십분 이해하면서도 객관적으로는 그 작동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과학적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실감을 끝내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최근의 뇌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뇌는 시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시뮬레이션한 값을 인지한다고 한다. 즉 외부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한 지각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을 주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컨대 손가락에 10의 자극이 가해졌더라도, 고통받는 장면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인식되면 체감되는 고통은 50을 넘어설 수 있다. 뇌는 자극의 실제 크기보다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예측한 강도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객관적 감각과 주관적 체감 사이의 값은 필연적으로 어긋난다.


이 어긋남은 신체 감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감각하는 모든 심신의 작용은 결국 과거를 넘어온 흔적들의 결과다. 기억으로 쌓아 올린 지층, 그것이 나라는 존재다. 나의 주관적 세계는 어쩌면 처음부터 어긋나고 왜곡된 세계다. 그렇다면 이처럼 켜켜이 각인된 흔적들은 정말 지울 수 없는 것일까. 한 번 새겨진 슬픔이나 고통은 두고두고 남아 오해를 품은 채 끝내 화석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동네에 새로 생긴 화실에서 이벤트로 진행한 원데이 유화 클래스에 다녀왔다. 누군가 무언가를 하는 모습이 쉬워 보인다면 그것은 그가 고수이기 때문이라 했던가. 나이프로 물감을 슥슥 문질러 순식간에 꽃잎을 만들어내는 강사의 손길을 보며 나도 호기롭게 캔버스에 물감을 얹어보았다. 그러나 둔한 내 손끝에서는 꽃잎이라 부르기 민망한 것들만 번번이 태어날 뿐이었다. 곤혹스러워하는 내게 강사는 다가와 나직이 말했다.


“유화의 장점은 덧칠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는 이도저도 아닌 물감 뭉텅이 위로 다시 색을 올리고 결을 다듬어, 기어이 크고 작은 꽃들을 피워내었다. 그러자 내 마음에도 파스텔 빛깔 바람이 불었다. 강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씩 손을 움직이자, 비로소 나만의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투박한 색깔도 일그러진 모양도 새로이 얹어진 물감 아래 고요히 모습을 감추었다.


과거와 현재가 순서대로 쌓이면서 그림은 끊임없이 모양을 달리한다. 유화 캔버스 위에서 지난날의 흔적은 쉬이 번지거나 휩쓸리지 않는다. 축축하게 젖어 찢어지거나 다음 날의 것과 무분별하게 뒤섞이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한 층 한 층 존재하며 묵묵히 미래의 바탕이 되어준다. 삶이란 이렇게 유화를 그리듯 과거의 흔적 위에 내가 원하는 색을 두텁게 올려 새로운 그림을 다시 완성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다. 그림 역시 가까이에서 보는 게 아니라 멀리서 감상하는 것이다. 그림 아래 남은 흔적을 집요하게 살피는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누군가 내 그림을 와서 만지려고 하거나 굳이 가려진 흔적을 찾아내려 한다면 다정한 목소리로 감상법을 알려주면 된다. 이 그림은 비싼 값을 치른 물감과 수없는 덧칠 끝에 완성된 작품이므로, 조금 떨어져 감상해 달라고. 그러니 이제는 나에게도 감상의 거리를 허락해도 좋겠다. 멀리서 보아야 지금 피어난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의 지금이 과거의 데이터로 재구성된 세계라면 우리는 그 데이터 위에 새로운 물감을 얹어 세계를 다시 그릴 수도 있다. 어차피 주관적 해석 없이는 객관적인 실제도 존재하지 않는 것.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거나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이라는 물감 아래에서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밑색이 된다. 우리는 그 견고한 바탕 위에 매일 새로운 색을 정성껏 덧칠하며, 어제의 흔적을 안은 채 어제보다 더 풍성한 오늘의 꽃을 피워낼 수 있다.


기꺼이 주관적인 나만의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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