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스투키가 있다. 해가 잘 드는 창가라고 하기엔 늘 소파와 에어컨에 가려져 조망권이 확보되지 않은 위치에서 몇 년째 함께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트리에 밀려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늘어진 전구 몇 가닥만 뒤집어쓴 채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다.
스투키는 관리하기 쉬운 식물로 알려져 있다. 고온 건조한 환경이나 그늘에서도 잘 자라며, 공기 중의 포름알데히드나 벤젠 등을 흡수해 공기 정화 식물로도 인기가 높다. 덕분에 신장개업이나 집들이 선물로 많이 쓰이는데, 나 역시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며 친척에게 선물 받은 화분이 바로 스투키였다.
나는 식물엔 관심도 없거니와 살아있는 것을 키우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다. 우리 집으로 온(정확히는 내게로 온) 생명체 중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거의 없다. 인간 두 명을 양육하는 것이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이자, 온 정신을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로선 화분 선물이 썩 달갑지 않다.
물은 생각날 때 한 번씩 주면 되고 어디에든 두어도 잘 자란다고 했지만,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고사리손으로 심어온 각종 미니 화분들의 말로를 떠올리면 스투키 역시 키울 자신이 없었다. 특히 스투키는 곧게 뻗은 잎의 모양이 사업의 번창과 재복을 의미하는 ‘돈나무’의 일종으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언젠가 바짝 말라비틀어질 스투키를 상상하면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가엾게 죽어갈 스투키보다, 혹시라도 그와 함께 바짝 말라비틀어질 우리 집 재정 상태가 더 두려웠다. 그래서 ‘제발 죽이지만 말자’고 다짐했다. 그 후로는 정말 ‘생각날 때’ 한 번씩 물을 주곤 했다. 그 ‘생각’이란 것이 때로는 일주일에 한 번일 때도 있었고, 더러는 두 달에 한 번, 대개는 한 달에 한 번쯤이었다. 그렇게 약 3년이 지났고, 문제의 스투키는 놀라울 만큼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친척 중에 스투키를 키우는 또 한 가정이 있다. 가계도의 복잡한 사정은 차치하고, 내게는 그냥 고모님이시다. 고모님은 원래 식물에 관심이 많고 키우는 일에도 능하여, 스투키 이전에도 거실과 사무실 여기저기에 다양한 식물들을 가꾸고 계셨다. 고모님 역시 이사와 집들이 선물로 스투키 화분을 받으셨는데, 얼마 전 그 화분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아무래도 뿌리가 썩은 것 같다고.
“생각날 때 한 번씩만 물 주면 된다던데요?”
라고 반문하는 내게, 고모님은
“그러니까,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주었지!”
라고 항변하셨다.
기본적으로 식물에 애정이 깊은 고모님은 선인장이 아닌 식물들의 습성을 떠올릴 때, 제아무리 잘 버티는 녀석이라도 물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셨을 것이다. 그 지극한 정성이 스투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셈이다. 그에 반해 식물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그야말로 ‘어쩌다’ 생각날 때 한 번씩, 혹은 이래도 죽지 않는 것이 기특해 한 번 더 물을 주었을 뿐이다.
관심의 방식과 강도가 같은 식물의 생사를 갈랐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사랑과 관심이 오히려 뿌리를 썩게 만든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이들에게 쏟아야 할 관심과 사랑의 성질이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아니, 변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행여 목마르거나 그늘지지는 않는지, 영양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수시로 지켜보며 과습에 가까운 관심이 필요한 시절을 지나고 나면 건조한 사랑이 필요한 시점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독려하고, 간섭하거나 앞서서 도와주지 않는 것. 결과가 부족하더라도 대신 결과를 내주지 않고, 그저 시도를 격려하며 과정을 지지하는 것. 혼자 생각하는 법을 기를 수 있도록 정답을 건네는 대신 질문을 남겨두는 것. 좌절 앞에서 끌어내지 않고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 무관심이 필요한 시기에 열심히 무심해지는 것.
아이 하나하나가 전부 고유한 객체임을 받아들이고 삶을 대하는 각각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
건조한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만큼이 아니라 상대가 받을 수 있는 만큼만, 혹은 필요한 만큼만 주는 절제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듬뿍 주는 사랑이 때로는 뿌리를 썩게 만들고, 적당한 거리 두기가 오히려 단단하게 자랄 힘을 준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정파 초고수의 기술.
우리 집 스투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나의 지극한 보살핌이 아니라 나의 무심함과 녀석의 생명력이 만난 우연의 일치였음을 안다. 하지만 그 우연한 시절을 지나며 무심했던 식물은 어느덧 애정하는 반려식물이 되었다.
이제 나는 녀석을 나름대로 더 사랑하게 되었지만, 관심이 증폭되었다고 해서 물을 더 자주 주지는 않는다. 늘어난 사랑의 크기만큼 들여다보고 간섭하는 순간, 녀석의 뿌리가 다시 썩기 시작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애틋하게 향하는 마음을 붙들고 애써 무신경해지는 연습을 한다. 지난 3년이 그랬듯 그저 생각날 때 한 번씩, 그러나 그 간격이 너무 멀어지거나 너무 가깝지 않도록 한껏 신경 쓰면서.
그것이 내가 창가의 스투키에게서 배운, 가장 건조하고도 가장 따뜻한 사랑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