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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Jul 21. 2023

서른다섯, 귀촌일기-시골에서 받은 문화충격들

나의 삶엔 이고 지고 갈 것이 없다

 만 서른다섯. 내가 살아야 할 곳이 정해졌다. 충청북도 음성군. 충북 통틀어 아는 지인 하나 없는 낯선 곳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서울살이 10년에 종지부를 찍고, 음성군의 한 면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하러 갔다. 면사무소에서는 전입 환영 선물로 태극기와 쓰레기봉투, 그리고 지역생활상품권 3만 원을 선물해 주었다.    

 

 음성군은 인구 1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다. 언뜻 와닿지 않아 비교해 보았더니 서울시 인구가 무려 940만 명이었다. 다닥다닥 낑겨 살았던 복잡한 서울을 뒤로하고 음성군으로 이사 온 첫 느낌은 탁 트인 개방감이었다. 도로가 한적하고 아무 데나 주차를 해놓을 수 있었고, 강아지가 실컷 뛰어다닐 공간이 많았다.


 처음에는 시골로 이사를 오면 주택에 살고 싶은 로망이 있었는데 안전상의 무서움도 있었고, 일단은 동네에 익숙해질 때까지 아파트에 살기로 했다. 또한 단독주택은 월세는 없고 매매만 있어서 덜컥 사는 것도 무리였다. 시골 와서도 결국 도시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고 다소 실망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 면에 밀집된 아파트촌이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몇 천 세대 정도 규모고, 그 주변으로는 텅텅 빈 역시나 시골 마을이다. 아파트 15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베란다 너머로 논밭과 산이 보였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강아지가 산책할 만한 둑방길이 많이 있다. 읍내의 진입구간도 집에서 다 내다 보인다. 읍내라니. 홍대며 강남을 휘젓고 다니던 내가 읍내라니.     


 처음 읍내를 한 바퀴 돌며 나는 재빨리 내가 아는 브랜드를 캐치했다. 치킨 브랜드, 화장품 브랜드, 자주 가는 빵집, 햄버거 브랜드까지 그래도 읍내라고 웬만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물론 브랜드가 하나씩 밖에 없어서, 햄버거 브랜드라고 해도 한 종류의 버거 밖에 먹지 못하지만. (네, 맞습니다. 웬만한 시골에는 롯데리아만 있습니다. 도시 나가서 맥도널드나 버거킹을 먹는 것이 큰 기쁨이며, 쉑쉑 버거나 수제버거 먹으면 그날은 만찬입니다)


 그런 것 마저도 그저 좋았다. 왠지 한국이 아닌 해외에 사는 것과 같은 결핍 아닌 결핍, 하지만 있을 건 모두 있고, 요즘은 식재료부터 생필품까지 인터넷에서 주문 못 하는 것도 없다. 삼십 분 거리에 혁신도시나 시내가 있고, 한 시간만 가면 서울에 닿을 거리가 있으니 무슨 걱정이랴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해서, 혹은 도시가 그리워서 일부러 도시를 찾은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다.  

   

 우리 동네는 밤 8시만 넘어도 문이 열려 있는 식당이 없고 배달 앱에도 “텅~”이라는 문구만 허무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처음엔 늦은 저녁 동네에서 밥 먹을 수 있는 곳을 찾다 실패하고 편의점에서 식사를 때운 적도 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읍내는 발전해 갔고 유행하는 마라탕집이나 삼겹살 배달집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어머니의 전통 손맛이 담긴 전국에서 유일한 가게들이 있고, 한 자리에서 30년 이상 계속된 숨은 맛집도 여럿 있다. 식당 사장님들이 집안 행사가 있다고 갑자기 문을 닫거나, 재료가 떨어졌다고 일찍 마감해 버리는 일도 종종 있지만, 나도 단골집이 생기다 보니 가는 집만 가게 된다. 당연히 이 동네 맛집들은 네이버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네이버 정보에 사진 한 장 없고 영수증 리뷰 같은 걸 동네 사람들이 해 주는 일도 거의 없다. 메뉴도, 이용시간도 올라와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 동네 맛집들은, 내가 영수증리뷰하며 찍은 사진이 거의 다인 곳도 많다.      


 네이버와 거리가 먼 동네다. 대중교통을 거의 사용할 수 없다. 버스정류장에는 단 하나의 노선만 있으며, 네이버 버스에도 정보가 아예 뜨지 않았다. 처음으로 동네에 왔던 날, 버스를 타고 회사에 나가 보려고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소식이 없어 택시를 잡으려고 카카오앱을 켰더니 한참 후에 겨우 택시 한 대가 잡혔다. 그동안 길에 오다니는 택시 역시 한 대도 없었다. 택시 기사님이 나에게 묻는다.

 “외지에서 오셨어요?”

 이 동네는 카카오택시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럼 어떻게 택시를 타냐고 했더니, 기사님들 전화번호를 저장해 두었다가 전화를 걸면, 콜 비 없이 집 앞까지 오신다고 했다. 만 원이 넘는 택시비가 나왔는데 기사님이 택시비 끝자리 잔돈도 깎아 주셨다.


 아파트에는 아파트 버스가 있다. 시간마다 읍내 나가는 아파트 주민들이 이용하는데, 행선지를 말해주면 기사님이 데려다주신다. 차 없는 주민들에게 꽤 유용한 서비스인 셈이다. 나름 동네에서 규모도 크고 좋은 아파트인데, 지은 지는 20년이 넘었다.     


 월세살이를 시작했다. 일단 처음 온 동네라 매매는 안 되겠고, 전세는 나중에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전세금 못 받아서 큰일 날까 봐 꺼려졌다. 그전에 서울에서 집 뺄 때에도 망할 집주인이 만기일이 되었는데도 다른 사람 구해질 때까지 전세금 못 돌려준다며 배 째라고 나와서 언성을 높인 적이 있는데 시골은 더 무서웠다. 그런데 월세 금액을 보는데 응? 21평 방 3칸 아파트가 보증금 1000만 원에 45만 원? 서울에서 제대로 된 원룸도 못 들어가는 가격에 15층 뻥 뚫린 뷰를 가진, 앞베란다 뒷베란다 딸린 집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마침 목돈은 회사 짓는데 거의 다 들어갔기 때문에 돈도 많이 없었다. 월세를 들어갈 타당한 이유까지 있었던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좀 주저했다. 1000/45 집을 보기 전에 1000/35, 1000/40 집도 보았기 때문이다. 다 빌라도 아닌 아파트였다. 서울에서 내가 살던 구조와 크기가 똑같은 복도식 19평짜리 아파트는 보증금 500에 35만 원만 주면 되었다. 하지만 돈 5만 원 10만 원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내가 지금 아니면 이런 호사를 누리지 못할 것 같아 1000/45의 지금 집을 선택하게 되었다. 동네 근처에 산다는 집주인은 3년이 넘도록 아무 간섭도, 연락도 없다.


 얼마 전에는 우리 집에서 6km 떨어져 있는 거리에 1000/17 월세 빌라가 나온 것을 보았다. 시골에서의 6km는 6분이면 도달할 거리다. 신호도 거의 없이 뻥 뚫려 있어서 가는 길에 브레이크 밟을 일도 거의 없다. 심지어 IC에 가까운 곳이라 역시 서울까지 1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가 보니 마을회관 옆의 정말 동떨어진 곳에 빌라 가구 몇 명만 있는 곳이었다.  


 이제 올해로 시골에 자리 잡은 지 만 3년이 넘어간다. 처음 왔을 때의 동네 분위기, 사람들의 여유로움, 조용히 귀를 열고 있으면 나는 잡새들의 소리, 계절마다 바뀌는 개구리소리, 매미소리, 귀뚜라미소리에 온통 마음이 빼앗겼다. 역시 지금도 시골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다시는 도시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다 좋다. 사실 1000/17 월세의 빌라를 알아본 것도, 몇 천 세대가 모여 사는 지금의 아파트촌보다 더 시골로 구석지게 들어가고 싶어서다. 만일 나중에 서울에 살아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아마 저렴한 월세의 시골집을 점찍어두고 주말마다 내려올 것 같다. 웬만한 펜션 놀러 가는 가격에 매주 들를 수 있는 시골집이 있으면 좋으니까.


 내가 시골에 내려온 첫 해에 여기 참 좋다고만 얘기했다면 첫눈에 반해 뵈는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인을 사귀어도 열정이 식을 3년 차 정도를 넘기니 이제 이 썰을 풀어도 될 것 같다.

 고요하고 한적하고 풍요롭고 여유롭고 가끔 충격적이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극대노 하는, 나의 시골 스토리를 시작해 본다.     




하늘이 맑은 날,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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