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란 무엇인가
어느 초등교사의 교육에 대한 단상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왜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으로 거창한 물음이다. 이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교사는 이 불확실한 '교육'이라는 것을 지금 여기서 매일 실천해 나가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조잡하더라도 나름대로 교육관을 머릿속에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교육철학은 정합성이 전혀 없고, 대체로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정보의 편린들을 뒤섞어 놓은 것이다. 논리보단 취향에 가깝다. 또한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우선 나의 교육관을 의식의 흐름대로 두서없이 적어본다. 일단 적어놓은 후,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며 다듬어 보기로 한다.
1.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잘삶'이다.
2.
잘삶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덕, 욕구만족, 해탈, 정복, 자기 극복, 공동체, 신앙 등등...
3.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은 단순한 욕구 충족보다는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는 느낌, 자신의 생활이 확장되는 느낌을 소중히 여기는 것 같다. 쉽게 말해 '가능성'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개방성 미래'라고 불렀던 것 같고, 니체는 '권력의지'라고 부른 것으로 알고 있다. 듀이가 말한 '성장'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물론 반대로 욕망과 자아의 소멸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4.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자신의 가능성을 넓히기 위해선 일차적으로 사회에 적응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미성숙한 어린이를 대뜸 사회에 진출시키면 어리둥절한 채로 헤매기만 할 것이다. 사회가 단순하던 구석기시대에는 굳이 학교가 없어도 아이들이 사회에 직접 참여하여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한 이상, 어린이들의 수준에 맞게 정보와 지식을 이유식 형태로 떠먹여 줄 사회화 기관이 필요하다. 그곳이 바로 학교다. 따라서 학교의 일차적 기능은 사회의 축적된 가치와 지식을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4-1.
그렇다면 사회의 수많은 가치와 지식을 어떤 방법으로 전달해야 할까? 플라톤은 동굴 속 죄수를 비유로 든다. 평생 동굴 속에서 산 죄수가 태양을 보게 하려면, 누군가가 고개를 '강제로' 돌려주어야 한다. 처음엔 강렬한 빛이 두려워 저항하겠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교사는 학생들을 강제로라도 지식으로 인도해야 한다. 학생들은 벽면에 비친 그림자에만 집착하므로 그런 유치한 흥미는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꽤나 많은 시간을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 건지 영문도 모르고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억지로 배운 내용들 중,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꽤나 도움이 된 것들도 분명 있긴 하다.
4-2.
듀이와 피아제는 플라톤과는 반대되는 이론을 펼친다. 인간은 선행경험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석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너무나 이질적인 경험은 오히려 부작용만을 일으킬 뿐이다. 교사는 항상 학생의 눈높이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재 학생의 관심분야가 단순한 소꿉놀이라고 치자. 교사는 소꿉놀이를 출발점 삼아 물의 끓는점,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 가정에서의 역할 분담 등등을 가르칠 수 있다. 학생은 최초의 협소한 관심에서 벗어나 더욱 넓고 복잡한 세계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최근 대세인 프로젝트학습, 주제통합학습이 바로 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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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연 모든 공부를 다 흥미에 맞춰서 할 수 있을까?
특히 수학 혹은 물리의 복잡하고 계열성이 엄격한 지식을 어떻게 흥미롭게 배운단 말인가? 한자 외우는 것(한자의 대다수는 단순 암기를 해야 한다), 알파벳 외우는 것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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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얼핏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다. 그러나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목적의식'이 있다면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행위도 즐기면서 할 수 있다. 한자를 외우는 것이 강요에 의해서라면 그건 노동이다. 장기기억에 남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사가 한자와 일상생활의 관련성, 한자를 외워야 하는 필요성을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설득력 있게 알려준다면, 학생은 동기를 갖고 적극적으로 공부에 임하게 된다. 듀이의 용어 '예견가능한 목적'(end in view)를 나는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다.
5.
그러나 사회의 문화유산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성 넓히기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모두 같은 행동을 보이며 비슷한 가치만을 공유하는 사회화된 인간들의 집단...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인간은 사회에 적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를 초월하기도 하는 존재다. 광장이 필요하지만 밀실도 필요하다는 것이 이에 어울리는 표현일까?
6.
따라서 교사는 기존 사회의 가치규범들을 의심해 보고, 주류문화에 포획되지 않은 자신의 고유성을 발전시키도록 학생들을 격려해야 한다. 어떤 정형화된 커리큘럼만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미지의 가능성, 무규정적 성장이 삶의 '목표 없는 목표'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성장에 미리 정해진 최종 종착점 따위는 없다.
6-1.
교사는 모순된 존재가 된다.
a) 본받아야 할 모범: 학생에게 복잡한 사회규범을 전달해 주는 존재
b) 극복되어야 할 존재: 학생은 그 사회규범을 뛰어넘어 독자성을 성취하고, 훨씬 더 큰 가능성을 탐색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회에 먼저 '적응'하지 않는다면 '초월'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교육받지 못하여 자신의 직관과 욕망이 내모는 대로 막사는 사람과, 사회 규범을 습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따르는 사람은 차이가 크다.(물론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다...)
6-2.
교사가 a) 에만 집중한다면 학생들은 역할놀이에 익숙해질 것이다. '말 잘 듣는 모범생' 역할 말이다. 평소 자신의 지도방식이 '노예도덕'을 조장하진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교사의 <본질적 기능>이다.
사회화와 자아실현을 돕는 것이 학교라는 기관과 교사라는 전문직의 목적 아닐까 싶다. 아마 탈학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반대하겠지만...
7.
교사의 <부수적 기능>으로 나는 '만남'을 꼽고 싶다. 부수적이라는 것이 결코 중요치 않다는 건 아니고, 그저 교사만의 고유한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은 교사에 앞서 부모, 친구들과 유대를 형성한다. 따라서 교사의 주된 역할이 학생과의 관계형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7-1.
그러나 어린 시절 어떤 선생님들은 수업내용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을 내 기억에 남겨줬다. 나를 일개 학생보다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해 주었던 분들, 즐거운 만남을 이끌려고 노력한 분들이 많이 계셨다. 교사와의 관계가 학생의 인간관계 전부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해도 될 만큼 사소한 관계도 결코 아니다. 학생들은 정규교과보다도 교사와의 만남에서 영향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 이른바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7-2.
하지만 무엇이 좋은 인간관계인지, 좋은 만남인지 난 잘 모른다. 이것 역시 여기서 전부 다루기에는 너무나 거창하고 복잡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