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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지용 Jan 15. 2024

나의 <장자> 읽기

무용한 <장자> 읽기

처음 <장자>를 접한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때늦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을 때라, 나는 니체나 쇼펜하우어 등 철학자들이 남긴 멋있는 글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군복을 입고 산꼭대기에 처박혀 화포나 닦던 암울한 시기에, 고통과 고독을 외치는 그들의 경구는 내 마음속에 쉽게 스며들었다. 그때 읽은 책의 내용 중 지금까지 의식에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던 그들 특유의 분위기는 나의 무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군대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는 한편으로 나는 한문 공부를 했다. 먼저 문법을 익혀야 문장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런저런 문법서를 읽어나갔다. 모르는 한자가 너무 많아 손바닥에 네임펜으로 한자를 적어놓고 훈련이 있을 때마다 야외에서 외우곤 했다. 그리고 <논어>나 <열자> 같은 비교적 얇아 보이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논어>는 나 같은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다. 난 군자도 아니었고, 세상을 다스릴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장자>를 만났다. 장자 역시 어둠 속에서 광기를 내뿜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했던 나는 곧바로 장자에 빠져들었고 전역할 때까지 주구장창 여러 해설서를 읽었다. 처음 읽었던 것은 강신주의 해설서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강신주가 <장자>를 풀이하는 방식은 여타 학자들과는 굉장히 달랐다. 이후 내가 여러 권의 해설서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자>에 관해 갈피를 못 잡았던 것은, 어쩌면 첫 번째 책과 이후 접한 책 사이에 너무나 큰 관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역한 후로도 <장자>는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일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인생에 환멸을 느낄 때면 나는 <장자>의 품으로 돌아가곤 했다.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사전을 열심히 뒤지다 보면 까닭 모를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론 그 안도감과 쾌감은 <장자>를 진정으로 이해해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다만 난해한 문장을 한 글자 한 글자 더듬어 읽어가는 과정 자체가,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런저런 번뇌를 잠시 잊게 해주었을 따름이다.

한때 나는 모든 생활을 버리고 먼 곳으로 떠나 <장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었다. 1년 가까운 시간동안 논문을 찾고 3년 치 생활비를 모으는 데에만 골몰했었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날아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곤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미 접었다.

요즘에 나는 <장자>를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다. 결국 <장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건 자질구레한 지식이나 글자가 아니라, 편안한 마음에 이른 경지일 테다. 사전을 뒤지거나 책을 읽는다고 망아(忘我)가 가능할 리 없다. 오죽하면 <장자>에 책이란 그저 찌꺼기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실어놨을까.

하지만 나는 오늘 밤도 <장자>를 읽는다. 총 5권의 책을 비교해가며 읽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저마다 해석이 천차만별이다. 도무지 같은 텍스트라고 하기 힘들 정도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문장도 참 많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장자>를 읽으며 감미로운 희열을 느낀다. 9만 리 상공으로 용솟음쳐 남명(南冥)으로 멋드러지게 날아가는 대붕의 모습은,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대붕이 상징하는 바가 초월자든, 道이든, 혹은 미지의 타자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개별자이든 간에, 그것은 하루살이처럼 오늘을 사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운 꿈이요,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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