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와 커피와 나
받는 나와 주는 나의 괴리에 관하여
얕고 넓음, 깊고 좁음.
한 때는 어떤 것이 더 낫고 더 좋고에 대한 기준이 확고했다.
내가 나름 나만의 기준으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잘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만의 것만 잘 꾸리면 되었던 시절을 거쳐, 준비되지 않은 역할에 대한 요구와 기대에 나는 부응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이 보기에는 그것이 한참 모자라 여러 상대방들과 1대 다수로 싸우는 느낌.
그 시간들을 지나고 나니 모든 것에 의문이 들었고, 내가 뭘 잘못했나? 나 지금까지 잘 해온 거 아니었나?
나는 멀티가 가능하고 그걸 꽤나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현재는 아주 단순히 하나의 역할만을 맡고 있을 뿐인데 그 안에서도 자꾸만 깜빡깜빡하고 놓치는 것이 있고 그마저도 지치고 버거운 상황을 종종 맞이한다.
오랜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한 구남친 현남편은 나의 좁디좁은 인간관계에 대해 두어 번 정도 지적하듯은 아니고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다.
너무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거 아니냐고.
연애하면서 친구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결혼하고서는 더더욱 친구 보기가 어려워 있는 친구랑 연락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도 신경 써서 해야 할 정도의 정신없던 나에게 신선한 관점이었다.
보고 싶은 친구도 못 보는데, 이게 적다고?
난 이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충분히 충만함과 우정과 공감을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보기엔 그게 부족해 보였나? 그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지?
친구의 수가 척도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건 다른 사람이 감히 알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것이 꼭 나의 까칠하고 뾰족한 성격을 꼬집는 것만 같아 속으로 가만히 되뇌어보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고집과 아집이 강해져서 이래저래 안 맞는 인연들을 잘라내면 정말 몇 없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아직 우기면 백세시대에 청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벌써 그렇게 몇 명만 남은 건가 싶기도 하고 나와 동시대를 살아오며 옆에서 오래 지켜본 남편은 무던한 성격에 크게 호불호도 없고 지적이면서도 매너 있고 약간의 유머와 센스도 있어서 어디서 사람을 만나든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는 편이다. 오랜 친구들과는 말할 것도 없고.
처음부터 폭넓게 친구를 사귄 것도 아니었지만, 그나마의 친구 중에서도 연락을 끊거나 자연스레 안 하게 된 친구였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괜히 나의 부족한 점을 끄집어내거나 만들어가며 침참하는 기분에 빠져있었다. 세계인 중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힘든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연말부터 부쩍 무기력함과 우울함이 커져서 그런 표현을 잘 안 하는 성격임에도 친구들과 친한 커뮤니티 멤버 몇몇에겐 우울증이 이렇게 오나보다고 할 정도로 혼자 힘든 시간을 보내며, 힘들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 힘든 건지.. 부정적 감정의 뫼비우스에 갇혀 있을 때 나를 현실로 불러낸 친구의 메시지.
"시드니야~ 런던이 신발 사이즈가 몇이지?"
(넷플릭스 종이의 집 등장인물 작명법을 따라 해 봄. 정작 보지 않아 내용은 전혀 모름;)
아들 키우는 나에게 딸 키우는 친구가 신발 사이즈를 왜 물어보지. 우리 애가 한 살 더 많아서 물려주거나 할 것도 없는데..
"런던이 220. 왜?"
"초등 입학하는데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려고"
이 친구는 나와 대학 동기로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친한 셋이서 자주 연락하고 가끔 만나 수다도 떨고 육아와 시댁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갈수록 소중해지는 B.F인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친구가 준다고 했을 때 머릿속에 바로 든 생각은 이미 먼저 학부모가 된 다른 친구의 아이 때 그렇게 해주지 못한 나의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비소집일을 앞두고 사전 정보가 아무것도 없어 어제 이 친구들과의 단톡 방에 먼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냐 물을 때 그런 미안함이 들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내 걱정이 앞서 그런 얘기 없이 내가 궁금한 것만 물어봤었는데-
나에게 런던이의 신발 사이즈를 물어본 친구에게,
그럴 것 없다고 안 그래도 어제 우리 단톡방에서 얘기하면서 뭐 작은 거라도 챙겨줄걸 그러지 못해 미안한 맘이 들었다고 하자 친구는 그 친구의 입학식 때도 작은걸 챙겨줬으니 너도 챙겨주고 싶다며 부담 갖지 말고 선물을 받아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안했는데, 더 미안해졌다.
이 친구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임신과 출산을 해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게 많았는데 먼저 학부모가 된 친구는 우리보다 한참 먼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키웠다. 해보기 전에는 육아가 그렇게 힘든 줄도, 집에서 자유롭게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고립된 느낌이 드는지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기간과 그 이후의 버거웠던 순간에 뜬금없이 이미 그 과정을 거친 그 친구에게 사과하는 말을 할 정도로 그땐 정말 몰랐다.
시간이 약이고, 지나고 보면 괜찮다지만 살아보니 서운하게 생각하면 끝없이 서운하고 괜찮다 생각하면 다 괜찮은 일인데. 이미 시간이 지난 후라 괜찮다고 말했을 수도 있지만 생각할수록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호불호에 대한 기준이 확고했던 시절, 나는 아주아주 소심한 트리플 A형이라 비슷한 A형하고 맞거나 포용력 있는 O형하고 잘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친해지고 나서 알고 보니 상대방 혈액형이 그런 거였다)
그래서 나름 상대방을 잘 배려하고 챙긴다고 생각해왔는데 일상의 순간순간 소소한 배려는 했을지 몰라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나 현재의 내가 경험하지 못한 영역이어도 챙길 건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일들이 생각나며 새삼 그들에게 매우 미안해졌다.
일례로 우리 아이보다 나이 많은 친구나 지인의 아이가 입학할 때 챙겨준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한 달 전, 다른 친구가 제안해서 함께 챙겨준 것.
런던이를 챙겨준 친구가 너무 고맙지만 한 편 나의 부족함을 또 하나 알게 된 것 같아 조금 더 깊게 침잠하고 있는 사이 다른 이로부터 톡이 왔다.
요즘 무슨 고민 있거나 힘든 일 있냐고. 나보다 한 살 많은 그분은 내가 목표하는 것들을 먼저 이룬 선배님 같은 느낌의 지인인데 나보다 바쁘고 역할도 많은 그분이 따로 먼저 연락이 와서 걱정해주고 따뜻한 커피 한 잔 하고 맘 편히 가지라고 하는데 그만 눈물이 핑-
어릴 땐, 많이 따지는 성격이었다.
(사실 얼마진까지만 해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뭘 해주면, 그 사람도 최소한의 답례나 비슷하게라도 하는지를 기억하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걸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력 자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내가 해 준건 해주면서 내가 이미 기쁘고 좋았으니 잊어버렸고, 잊고 있다가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게 마치 산타의 선물처럼 그렇게 고맙고 새삼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런 몇 번의 경험들이 더해지니 그게 굉장히 마음이 편하고 작은 일에도 기쁘고 내가 인복이 많은 사람같이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고. 그러면서 나도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꿈틀거린다.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소중하고 좋은 만큼 나도 그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그들을 잘 챙겨야겠다는 마음.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보석이 소중한 건 잘 세공되어서이니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더 아끼고 잘 보살피는 내가 되어야겠다는 마음 뜨거운 다짐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