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2시 30분.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가 곧 하교할 시간이다.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향해 달렸다. 혹시라도 늦으면 아이가 혼자서 기다리게 될까 봐 나는 페달을 세차게 밟았다. 자전거가 가르는 길 양 옆에는 나무들이 우거지고 푸르른 나뭇잎 사이로 노랗게 내리쬐는 햇살에 봄의 기운이 가득 느껴졌다. 봄은 역시 새로운 시작을 느끼게 해주는 계절이다. 학교 앞에 도착해 5분 정도 기다리니 교문밖으로 아이가 나왔다. 아이는 "엄마"하고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오늘 학교에서 재밌게 보냈어?"
"점심밥은 잘 먹었어?"
"입고 간 옷은 덥지 않았어?"
"친구는 좀 사귀었어?"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아이가 천천히 끄덕끄덕 대답할 때마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가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렸다. 나는 아이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아침에 깔끔하게 묶어줬던 머리가 많이 헝클어져서 있는 것이 눈에 걸렸다.
"점심밥을 먹긴 했는데 그래도 배가 고파요."
"그래, 빨리 집에 가서 간식으로 뭘 먹을지 좀 보자."
아이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니지만 우리가 사는 동이 학교에서 꽤 멀고 집에 오려면 건너야 하는 아파트 정문 앞 도로에 차가 꽤 많이 다녀서 나는 아이를 꼭 데리러 간다.
집에 와서 아이에게 초코파이와 떠먹는 요구르트 그리고 사과를 간식으로 주고 아이와 식탁에 앉았다.
"점심밥을 많이 안 먹었어? 왜 벌써 배가 고파?"
"밥을 늦게 먹으면 친구들이랑 같이 못 나올까 봐 조금만 먹었어요."
"그랬구나. 오늘은 수업시간에 뭐 배웠어?"
"꿈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잘 때 꾸는 꿈 말고 어른되서 뭐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꿈이요."
"응 그랬구나....."나는 큰 흥미 없이 대답했다.
"근데 엄마는 꿈이 뭐예요?"
갑자기 물어온 아이의 질문에 나는 너무 당황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꿈이 뭐냐고.... 마흔넷의 나이에 9년째 경력단절이 된 전업주부인 나에게 꿈이 있었던가...? 더구나 아이는 지금 현재형으로 물어보고 있지 않은가. 꿈이 뭐였냐가 아니라 꿈이 뭐냐고.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목에 뭔가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힘든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았다.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울컥했지만 아이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말을 돌렸다.
"지우야, 네..... 꿈은.... 뭐야?"
갑자기 감정이 격해서 목이 조금 메었지만 다행히 아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 꿈은 화가예요. 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잖아요?"
"그림을 아주 아주 잘 그리는 화가가 될 거예요. 그런데 엄마 꿈은 뭐예요?"
아이는 잊어버리지도 않고 나의 꿈이 뭐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나는 서글픈 생각이 들어 말을 잇기 힘들었지만 엄마에겐 꿈이 없다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엄마 꿈은..... 기자였어."
이 말을 하면서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기자? 그게 뭐예요?"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글이나 말로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야."
"엄마는 기자가 됐어요?"
"아니."
"왜 안 됐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지금은 꿈이 뭐예요?"
어린아이 앞이었지만 선뜻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내 꿈이 뭔지 생각해야 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간직해 온 아주 비밀스러운, 감히 꿈꾸기 부끄러운 꿈이었기 때문이다. 20대의 나처럼 곧 실행에 옮길 목표가 아니라 '언젠가' 이루고 싶은 막연한,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잊고 지냈던 꿈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나의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는 기분이었다. 아이가 다른 가족들에게 내 꿈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딸아이는 너무나 천지난만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꿈은...... 글을 쓰는 작가야."
"작가가 뭐예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글로 써서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는 사람."
"음, 그넣구나요."
딸아이는 아이 특유의 귀엽고 어눌한 말투로 이야기를 마치더니 이제 알았으니 더는 관심 없다는 듯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내 꿈에 대해서 아주 오랜만에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글을 2019년 3월에 썼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기 같고 귀엽던 딸은 어느덧 초등학생 5학년으로 사춘기에 접어들어 요즘 내 속을 매일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아이의 꿈도 화가에서 작가로 바뀌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느새 엄마의 꿈이 작가라는 것도 까맣게 잊은 것 같다.
그때 딸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으로 끄집어내게 되었던 나의 꿈을 한 번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브런치 스토리의 작가 신청을 위해 이 글을 써 놓고 "작가의 서랍"속에만 보관해 온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용기를 내어 작가 신청을 했지만 선정이 되지 않았다. 꽤 실망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신청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4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브런치 스토리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냈는데 더 늦기 전에 글쓰기를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브런치 스토리가 생각이 났다. 두 번째 시도로 작가로 선정된 후 다시 꺼내든, 서랍 속의 4년 된 글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발행해 본다.
그리고 이제 나의 꿈,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해 매일 생각하고 매일 조금씩 다가가기로 했다.
제 첫 번째 시리즈 글 "이직왕의 직장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곧 다음 글을 준비해서 내놓아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