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회사 - 대학시절 꿈꿔왔던 금융계 직장
아침 7시 30분. 나의 생애 첫 직장, 증권회사의 출근시간이었다. 보통 회사원들은 9시까지 출근하는데 왜 여기는 출근시간이 이렇게 빠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첫날부터 불만이 생겼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객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 이것이 뉴스에서만 보던 증권회사의 시세 전광판이구나'하며 속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첫 업무는 신문기사를 스크랩하여 게시판에 붙이는 것과 주식시장이 개장할 때 VIP고객들에게 요구르트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나는 지점장님께서 알려주신 VIP들에게 요구르트를 건넸고 공손하게 인사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먹을 것 가지고 치사하게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주나?' 하는 객기가 발동했다. 나는 VIP고객들에게 주고 남은 요구르트를 객장 안의 모든 고객에게 나눠주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내 모습을 지켜본 지점장님이 달려와 내가 '뿌린' 요구르트들을 고객들한테서 허리를 굽혀가며 수거하기 시작했다. 지점장님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요구르트는 VIP와 VIP가 아닌 고객을 구별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그제야 내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다음 업무는 인사하기였다. 지점장님은 내게 "환영합니다"라고 쓰여있는 어깨띠를 주시며 지점의 문 앞에서 고객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했다. 내가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공손히 인사하자, '안녕하십니까?'를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하셨다. 내가 좀 더 큰 소리로 인사를 하자 "더 크게", "더 크게"를 외치는 모습이 마치 훈련소의 교관 같았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내가 신입사원이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0분도 넘게 문 앞에서 소리 질러가며 인사하는 내가 안쓰럽게 느껴졌던지 나이가 지긋한 고객 한 분이 나를 커피 자판기 쪽으로 부르셨다. 내게 커피 한 잔을 건네시며,
"증권영업사원인가요? 증권회사에서 일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자신 있어요?"
"연봉이 높아서 처음에 돈은 많이 벌겠지만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결국은 투자로 돈을 다 잃더라고요. 잘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영학과 2학년 시절 내 진로를 금융계 쪽으로 정했다. 그래서 전공과목 중 투자론, 재무관리세미나, 상법 등 투자와 관련된 과목을 모두 선택해서 수강했고 투자 관련 자격증도 공부했다. 그 결과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투자상담자 자격증 1종과 2종을 모두 취득했고 증권분석사 자격증 1차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회의감도 찾아왔다. 내가 '돈'만을 쫓는 이 분야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회의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 짙어졌고 나는 끝내 증권분석사 자격증 2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내가 존경했던 재무관리를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 본인도 증권회사에서 근무를 하신 적이 있는데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결국 본인 돈과 처가 집 돈까지 다 끌어다가 투자하면서 힘들었고 결국은 증권회사를 그만두셨다는 말씀도 하셨다.
대학교 4학년이 되었지만 나는 진로의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일단 취직은 해야 했기에 내가 가진 자격증을 "써먹을 수 있는" 직장으로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운 좋게 합격을 했고 나는 증권회사 업무를 일단 경험해 보고 진로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고객 분께서 해주신 이런 말씀을 나는 그냥 흘려듣게 되지 않았다.
‘인사 업무’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자 한 직원이 금융상품설명서를 가지고 오면서 내가 숙지해야 한다고 했다. 각종 금융상품의 이름과 그에 대한 설명이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상품의 이름도 생소했지만 상품 설명은 아무리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었다. ‘아, 이 어려운 내용을 내가 완벽히 이해하여 고객들에게 이 상품들을 팔아야 한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났다. 나는 지점 내 직원들에게 설명을 구하고자 찾아갔지만 모두들 바쁘다며 정신없이 일을 했다.
출근한 지 며칠이 지나도 나에게는 금융상품 숙지 외에는 아무런 업무도 주어지지 않았다. 금융상품 설명서는 아무리 읽어도 혼자의 힘으로는 이해가 어려웠기에 잠시 다른 일을 배워보고자 옆에 계신 차장님을 응시했다. 차장님은 12년 차 증권영업 업무를 하고 계신 분으로 책상 옆, 커다란 2개의 모니터에 있는 주가차트를 열심히 보고 계셨다. 내가 ‘지금 뭘 보고 계시는 것이냐, 나에게도 좀 일을 알려달라’고 말하자 ‘지금은 너무 바쁘니 말 시키지 말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혼자서 어려운 금융상품설명서를 숙지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상장사들의 종목코드를 외우며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저녁도 회사에서 먹고 9 시인 퇴근 시간은 결코 다가오지 않는 듯했다. ‘7시 30분에 출근해서 9시까지 일하다니 도대체 몇 시간을 회사에서 일하는 것인가?’ 이런 회의는 마치 나만 품는 것처럼 다른 직원들은 모두 당연한 듯 계속 바쁘게 일만 하고 있었다. 주식시장은 9시 개장, 3시 30분 폐장인데 이렇게 일찍 출근해서 9시까지 일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저녁 즈음에 지점장님께서 최 과장님께 서류를 가져다주라고 하셨다. 최 과장님은 경영학과 선배였다. 학교 다닐 때 얼굴도 못 봤던 5년 이상은 되는 선배여서 선배라는 말이 무색한, 내겐 그냥 직장상사였다. 그는 내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심부름으로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불편했다. 그는 내게 회사생활에 잘 적응이 되느냐는 상투적인 질문 몇 마디를 하더니 자신은 프로그램 매매 업무를 하고 있다며 자기 업무 얘기를 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프로그램 매매’가 뭔지 아냐고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자격증을 공부할 때 접했던 개념이 생각 났지만 실무에서 어떻게 매매가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투자상담사 자격증 가지고 있는 것 아니야? 투자상담사 자격증만 있으면 뭘 하나? 프로그램 매매 뜻도 모르고.”
“이론만 알면 뭘 하나 실무를 알아야지!”.
“그런 식으로 해서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계속 비아냥거렸고 나는 속상하고 화도 났지만 듣고만 있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 금융계의 지각변동이 크게 있었던 2001년도였다. 증거거래법이 개정되어 증권영업을 하려면 반드시 투자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했다. 기존에 증권회사에서 증권영업을 하던 직원들도 투자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하면 본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 과장님은 투자상담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학을 갓 졸업한 내가 해당 자격증의 1종과 2종을 모두 가지고 있자 내게 열등의식과 질투심을 느낀 것 같다.
학창 시절부터 꿈꿔왔던 금융계 직장이었지만 나는 입사 전부터 증권회사의 업무에 확신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함께 일하는 직원들마저 나에게 싸늘하게 대하니 나는 업무를 더 경험해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증권회사를 그만뒀다. 학창 시절부터 자격증 공부에 쏟아부은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퇴사를 하고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는 내 진로를 무역업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 업무를 하기 위한 기본 자질, 즉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나는 2001년이 끝나가는 겨울에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