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류 수입회사 - 내가 정육점에 취업했나?
"차돌박이 입고 됐습니다."
"채끝살은 언제 들어와요?"
"4일 후에 입고됩니다."
"목심 10톤, 등심 15톤 주문해 주세요."
"우둔살은 내일 입고됩니다."
이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끝없이 들려오는 직원들의 대화 내용이다. 내가 출근한 첫날, 내가 육류 수입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이런 내용의 대화는 무척이나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가 정육점에서 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10개월간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르바이트로 모아놓은 돈도 어학연수 비용으로 다 쓰고 더 이상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깐 다닌 회사와 아르바이트 한 기간 그리고 어학연수 기간까지 다 합치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2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처럼 대기업에 원서를 넣어봤지만 그해 졸업한 학생들과 경쟁을 하기엔 역 부족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공백기간이 더 길어지기 전에 눈높이를 낮춰서 중소기업 여러 군데에 지원을 했고 그중 제일 먼저 합격시켜 준 회사에 입사했다. 늦으면 아예 취업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조바심이 압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무역팀에서 막내였다. 무역팀에는 나와 동갑내기인 주임이 한 명, 그 위에 대리가 한 분, 과장이 두 분 계셨다. 과장님 중 한 분은 캐나다 교포로 우리말은 좀 어눌하게 구사하지만 영어는 원어민과 동일한 수준으로 사용하는 분이었고 다른 한 과장님이 팀장이었다. 나는 무역팀에서 신용장을 개설하고 수입원가를 계산하는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우리 회사는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호주에서 소고기를 수입하고, 프랑스에서 돼지고기를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하는 회사였다. 수입을 담당하는 무역팀 직원들은 당연히 영어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캐나다 교포 과장님을 제외하고는 영어를 잘하는 분이 없는 듯했다. 다른 직원분들은 영어로 쓰인 글을 어느 정도 읽을 수는 있지만 영작을 하거나 의사소통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부서의 막내인 내가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고 하니 나를 우러러보며 부러운 듯 얘기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내가 놀랐다.
하지만 내게는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업무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회사의 주요 품목을 잘 이해해야 했는데 아직 신입사원이니 영어가 필요한 일은 캐나다 교포 과장님이 바쁘실 때 나에게 가끔 던져주시는 번역 업무가 고작이었다. 대신 캐나다 교포 과장님께서 해외셀러(seller)들과 이메일 서신을 할 때 나를 참조해 주셔서 그 이메일들을 꼼꼼히 읽고 출력하여 필사도 하는 등 나는 실무영어 실력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회사의 품목, "고기"에 대한 이해였다.
팀장님은 나에게 무역 실무와 고기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해주시며 교육시켜 주셨다. 무역에 대한 설명은 쉽고 재미있게 느껴졌는데 고기에 대한 설명은 도무지 재미가 없고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저항심까지 생겼다. 고기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역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느 날 팀장님은 나에게 아래층 사무실에서 영업팀 과장님께서 진행하시는 수업이 있으니 듣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필기도구를 준비해서 내려갔는데 수업 내용은 다름 아닌 소고기 부위에 대한 것이었다. 화이트보드에는 소고기 부위를 표시한 커다란 소 그림이 붙여져 있었다. 수업에 참여한 사람은 나 외에도 여러 부서에서 온 직원분들이 계셨다. 기존 직원분들도 이런 교육이 필요한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며 수업을 들었다. 소고기 부위에 따라 육질이 어떠하며 맛이 어떻게 다르고 값은 어떻게 차이나 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었다. 정말 관심이 가지 않고 집중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슬라이드로 소의 도축과정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 시점에 되자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역함을 느꼈고 기분이 몹시 우울해져서 정말로 "버릇없게" 신입사원의 신분을 무릅쓰고 수업 중에 뛰쳐나왔다.
이 일로 무역팀 팀장님한테 한 소리를 들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영업팀 과장님께 죄송하다는 생각만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렇게 일상적인 업무를 하며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무역팀의 바로 옆 사무실에 계신 부사장님께서 갑자기 나를 부르셨다. 들어가 보니 본인이 오늘 저녁에 경영대학원 수업에서 사용할 유인물을 나더러 복사해 오라는 것이었다. 유인물의 두께는 A4용지 100장은 족히 넘어 보였다.
'경영대학원이라면 자기 사적인 일 아닌가?'
'회사 근무시간에 나더러 회사일을 하지 말고 자기 사적인 일로 복사를 하라고, 더구나 그렇게 많은 양을?'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아 불만만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복사를 하지도 않았다. 아직 "젊은"나는 불의를 보고 아무렇지 않은 듯 굴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정황을 눈치챈 팀장님이 나를 불러 왜 복사를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사적인 일을 직원에게 심부름시키는 일이 부당하게 느껴져서 하고 싶지 않다고 버텼다. 내가 설득이 될 것 같지 않게 느껴졌는지 팀장님이 직접 복사를 해서 부사장님께 가져다 드렸다. 잠시 후 팀장님은 나를 불러 지난번 '고기'수업 때 내가 뛰쳐나왔던 일까지 더해서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고기 회사에서 고기 공부를 안 하면 업무를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윗사람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 한다' 등이었다. 팀장님은 혼을 냈지만 나는 혼나지 않았다. 다만 나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정녕 이런 것인가?', '윗사람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고기 회사에서 고기 공부를 하기 싫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며칠 동안 회사의 업무를 기계적으로만 하고 있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와중 캐나다에서 광우병이 발생했다. 아침에 출근을 하자 무역팀 직원들이 모두 이미 출근을 한 상태였고 과장님들은 어딘가와 정신없이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무역부를 비롯한 회사 전체가 비상사태에 돌입한 것이다. 광우병 발생으로 정부에서는 캐나다 산 소고기 수입을 중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팀장님은 이미 부산항에 도착한 수송품은 어쩔 수 없지만 캐나다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오고 있는 즉,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은 캐나다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고 했다. 배가 부산항에 도착하면 수송품을 국내에 유통할 수 없기 때문에 창고에 보관하게 되는데 수입 중지가 언제 해제될지 모르기 때문에 창고비가 엄청나게 부과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음 커리어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사직서를 내고 싶었지만 회사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도와야 했다.
나에게도 임무가 주어졌다. 은행에서 받은 신용장에서 오류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신용장 거래는 수송품의 하자를 문제 삼을 수 없고 서류상의 하자를 문제 삼아야 수입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신용장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문서를 발행할 때부터 매우 꼼꼼하게 검토를 한다. 따라서 신용장에서 하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리님은 절박함에 오타라도 찾으라고 지시했다. 우리 회사가 캐나다에서 수입하는 물량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절박함은 없는 능력도 생기게 해주는 것일까? 하자를 찾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서류에서 오타를 찾으려니 상당한 수의 오타가 발견되었다. 그중 전치사나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의 철자 오류는 하자가 되지 않았지만 항구의 이름인 Busan을 Busen으로 잘못 쓴 것과 같은 경우는 하자가 되었다. 나는 하자가 될 수 있는 오타를 상당수 발견하였고 뱃머리를 돌리는데 일조할 수 있었다. 과장님들도 캐나다 수출업체와 협의하여 이미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국내에 유통할 수 없는 물량에 대해 어느 정도의 피해보상액을 받은 것 같았다.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가고 사무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한 달이 더 넘게 지났지만 나는 준비해 뒀던 사직서를 팀장님께 제출했다. 팀장님은 좀 더 근무해 보면 업무에 적응이 되지 않겠느냐며 나의 결정을 만류했지만 나는 확고했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직장의 종료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