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회사 - 가장 즐겁게 일한 회사, 그리고 그곳에서의 해고
육류 수입회사에서 회사의 주력 품목이 나와 너무 맞지 않아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나는 흥미 있는 업종을 찾고 싶었다. 캐릭터 라이선스를 하는 회사였다. 비록 작은 신생 회사이긴 했지만 나는 일이 재미있을 것 같았고 앞으로의 전망도 밝다고 생각하여 입사를 결정했다.
회사의 규모는 매우 작았고 역시나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전 회사에서 근무할 때는 무역부에 직원도 많았고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시는 과장님께서 계셔서 부서의 막내인 나는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반면 이 회사에서는 회사에 영어로 된 문서가 있으면 모두 내 손을 거쳐야 했고 해외영업부의 주요 업무를 나에게 맡겼다. 해외 바이어와 서신 왕래 하는 일, 바이어 발굴을 위해 미국과 유럽에 홍보 이메일을 보내는 일, 회사의 주요 캐릭터 소개 및 스토리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 등이 나의 주요 업무였다. 해외 바이어와 때때로 전화통화도 했지만 MSN메신저를 통해서 영어로 업무 채팅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해외영업부 업무에 푹 빠져있었다.
입사 후 4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사장님께서는 곧 나와 미국으로 출장을 갈 것이니 출장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설마 나를 미국 출장에 보내신다고?’
나는 내가 해외 출장을 간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어학연수와 백수 시절 등의 공백으로 나이는 20대 중 후반이었지만 나의 직장경력은 매우 짧았기 때문이다. 설렘과 두려움을 가지고 미국으로 출장을 갔지만 큰 실수 없이 업무를 잘 마치고 왔다. 그 이후로도 나는 중국과 일본으로 출장을 가 현지 라이선스 전시회에 참석하여 회사의 캐릭터를 홍보하고 바이어들과 미팅을 하는 출장 업무를 잘 마쳤다. 나는 이렇게 해외 여기저기로 출장을 다니는 것이 꿈만 같았고 나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리 회사는 캐릭터 저작권을 소유한 다른 회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그 캐릭터를 상품화하는 에이전시 회사였다. 회사는 새롭게 계약할 캐릭터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그 캐릭터는 칠레 회사의 저작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을 여러 나라와 전략적으로 체결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칠레 캐릭터를 물색하고 있을 2004년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었고 회사는 그때가 계약서를 체결할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와 칠레 회사 간에 계약의 중요하고 대략적인 내용이 합의된 후 본격적으로 계약서가 오가기 시작했다. 논의가 되면서 계약서는 점점 복잡해졌고 양 회사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는 서로 합의하는데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몇 달에 걸쳐 계약서는 거의 마무리되었고 양 회사의 사장님이 직접 만나서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칠레와 우리나라의 중간 거리인 미국 LA에서 회의가 열렸다. 회의 당일은 어느 때보다도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이었지만 이례적인 상황 없이 무사히 계약서가 체결되었다. 회의 전날까지 계약서를 검토하느라 밤잠을 거의 설친 나는 피곤으로 지쳤지만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시련의 서막일 줄은 몰랐다.
귀국 후 나는 칠레 회사와의 계약서 합의 내용을 이행하기 위한 업무를 하고 있었다. 칠레 회사 담당자는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갑자기 칠레 회사와의 의사소통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스페인어가 가능한 직원을 채용할 것이라고 했다. 며칠 후 신입직원이 채용되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이 직원은 아르헨티나 교포였다. 신입 직원은 성격이 밝고 회사 생활에 적응을 잘해서 나는 물론 함께 일하던 디자인실 과장님과도 금세 친해졌다. 그런데 이 직원은 영어도 잘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문득 이 직원은 내가 하는 업무도 모두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사장님과 이사님은 나와 디자인실 과장님을 회의실로 불렀다.
사장님과 이사님은 그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과 우리가 고생하며 이뤄낸 일들을 얘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장대하게 늘어놓아 무슨 말인지 핵심을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결론 즈음에 새로 계약을 체결한 칠레의 캐릭터 회사는 기존 다른 저작물의 회사들과는 달리 저작권을 가진 회사에서 캐릭터의 모든 이미지와 영상을 편집하여 우리 회사에게 보내주기 때문에 더 이상 캐릭터 디자이너는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칠레는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보다는 스페인어로 의사소통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데 새로 채용된 신규 직원은 스페인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어서 영어만 가능한 나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아, 그래서 곧 다른 회사를 찾아봐야 한다는 얘기구나.’라고 대충 알아들었다. 어느 정도의 예상을 못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이야기를 들으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또다시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는 현실감에 갑갑한 생각도 들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평소 책임감이 강한 나는 곧바로 업무 인수인계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좀 전에 같이 회의실로 불려 갔던 디자인실 과장님이 나를 불렀다.
“대리님, 지금 뭐 하세요?”
“저, 업무 인수인계 문서 작성하고 있는데요?”
“그런 걸 뭣 하러 해요? 아까 회의실에서 못 들었어요? 우리 보고 지금 바로 회사 나가라는 얘기잖아요?”
“네? 정말이요? 지금 당장이요?”
“네…… 얼른 짐 싸요. 이렇게 쫓겨 나가는 마당에 인수인계가 무슨 필요예요? 나랑 같이 나가요.”
직원들이 사직서를 낼 때는 대체 직원 채용을 위해 1~2개월 전에 사직서를 내라고 해놓고 해고할 때는 이렇게 준비 기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통보하다니 사회생활 새내기였던 나는 너무 황당하고 속이 상했다. 상자와 가방에 짐을 가득 싸서 나오려니 억울함에 눈물까지 흘렀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도 즐겁게 일했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당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