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회사 - 원치 않은 영국 파견
캐릭터 회사에서 어이없는 해고를 당했지만 업무는 즐겁게 했기에 나는 다시 콘텐츠 업계에서 구직을 시도했다. 온라인 게임회사의 채용공고가 눈에 띄었다. 그 회사는 내가 대학시절에 남학생들이 매일 PC방에 가서 플레이하던 그 유명한 게임을 만든 회사이기도 했다. 입사지원서를 제출했고 면접에서 합격했다.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 채용이 됐기에 바로 다음날 출근을 했다.
해외영업팀에는 총 5명의 직원이 있었다. 일본 지역 담당 1명, 중화권 담당 1명 그리고 영어 지역 담당이 나를 포함해서 3명이다. 영어 지역 담당 중 2명은 병역특례자인데 해외유학파로 영어는 잘하지만 정식직원이 아니어서 비중 있는 업무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영국 지역의 담당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부서의 팀장은 다름 아닌 회사의 부사장님이었다. 원래 있었던 팀장은 얼마 전에 해고당했고 믿을 만한 팀장을 채용하기 전에 부사장님께서 팀장 역할을 하시기로 하셨다.
나는 매일 출근하자마자 내가 담당하고 있는 영국 지역 계약서를 검토했고 영국 게임회사에 제출하기로 한 게임 텍스트 번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 등 뒤에서 누군가의 “게임 좀 해라”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사장님이었다.
우리 회사의 모든 직원들 책상 위에는 모니터 2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 대는 업무용, 다른 한 대는 게임용 모니터였다. 게임회사에서 업무로 게임을 해야 한다는 말이 이상한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에도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회사가 주력으로 마케팅하고 있고 내가 담당하고 있는 영국 지역에 계약된 게임은 MMORPG였다. 이런 게임은 내게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하지만 업무의 일환이니 나는 어쩔 수 없이 게임을 해야 했다. 출근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멀리서 사무실 전경을 보면 여기가 사무실인지 PC방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직원들의 도움으로 게임에 접속하여 캐릭터도 만들고 아이템도 획득하며 레벨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캐릭터가 적에게 공격을 당해서 내 눈앞에서 칼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아무리 가상의 게임이지만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고 한 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하니 나는 게임을 하고 싶어지지 않았고 게임을 하는 것이 업무의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내가 일반 업무를 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신 부사장님께서 “게임 좀 해라”, “게임을 해야 한다”, “40 레벨 이상은 되어야 한다” 등 잔소리를 심하게 하셨다.
우리 부서의 다른 지역 담당자들은 업무 시간 동안 수시로 파트너 회사와 이메일을 주고받고 필요한 경우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침에 출근을 하면 영국 게임 회사로부터 이메일 여러 개가 한꺼번에 와 있었다. 바로 시차 때문이었다. 다른 지역 담당자들은 칼 퇴근을 할 수 있는 반면 나는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내가 퇴근하려고 준비를 하면 MSN메신저로 영국에서 업무 요청을 했다. 심지어 전화가 오기도 했다. 신사 국가라더니 영국 직원들은 자기들이 필요하면 상대회사 직원의 퇴근 시간도 상관없는지 퇴근해야 한다고 해도 이것만 부탁한다며 계속 업무 요청을 했다. 내가 필요한 업무가 급해서 전화를 해야 할 경우에도 야근을 해야 했다.
우리 회사가 영국 회사에 게임을 파는 위치에 있었지만 게임업계 특성상 우리 회사는 소위 ‘갑’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영국 회사는 절대 ‘을’의 위치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원하는 요구사항을 얘기할 때도 우리 회사는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계약서 내용을 언급했는데 영국 회사는 요구사항을 얘기할 때마다 계약서 내용을 인용하며 당연한 듯 요구했다.
나는 그런 영국 게임회사를 점점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영국 게임회사의 담당자는 말을 돌려서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원하는 사항을 요구하거나 내가 요청하는 사항이 맘에 들지 않으면 매우 직설적으로 불쾌감을 표현했다. 나와 그 영국 직원은 서로 지지 않고 거의 싸우다시피 업무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런 와중 부사장님께서는 나에게 영국 파견 근무를 제안하셨다. 계약서에는 필요할 경우 한국 회사가 영국 회사에 최대 세 명의 직원을 파견 보낼 수 있고 그 비용은 모두 영국 회사가 부담한다고 적혀있었다. 이 조항은 계약 협의 때부터 논란의 여지가 많았지만 끝내 관철되었다. 한국 회사가 부담할 비용이 전혀 없으니 우리는 직원을 파견시키는 것이 이득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그 파견직원 중 한 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처럼 가고 싶지 않다고 억지도 부려봤지만 회사의 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파견직원은 게임 운영팀에서 1명, 게임 개발팀에서 1명 그리고 나 이렇게 구성되었다. 도착해 보니 영국 게임 회사는 개발 회사는 아니었지만 우리 회사보다 훨씬 규모가 큰 회사였다. 우리 직원들은 미로 같은 영국 게임 회사 건물의 게임 운영팀 사무실 한쪽에 배치되어 업무를 했다. 영국 회사의 직원들은 나에게 때때로 업무 도움을 요청했고 내가 문제를 해결해 주면 매우 고마워했다. 영국 직원들을 문서나 전화가 아닌 면전에서 대하니 크게 화낼 일도 없었고 나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던 와중 영국 게임회사는 게임 서비스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며 한국의 파견 직원들과 회의를 열자고 했다. 한국 본사에 컨퍼런스콜까지 연결하며 진행해야 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나는 주로 통역 역할을 하며 회의 내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영국 회사는 현재 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본사에 특정 데이터의 소스(source)를 요청했다. 그런데 내가 통역을 하기도 전에 한국의 게임 개발팀장은 ‘소스’라는 말만 듣고 그건 절대 안 된다며 강하게 거절했다.
이 소스(source)라는 용어는 내가 본사에서 근무할 때도 여러 번 문제가 된 적이 있어서 나는 내가 중재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영국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회의 중단을 요청하여 한국 본사 직원에게 설명을 했다.
‘영어로 소스(source)라는 단어는 다양한 뜻이 있다. 영국 직원들이 요청하는 소스(source)는 한국 직원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게임 소스(game source: 게임 개발의 핵심이 되는 소스)가 아니라 특정 데이터가 작동을 하도록 하는 그 원천을 얘기하는 것이다’라고. 용어 하나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 상황이었다.
한국 본사 직원들의 오해는 풀렸고 영국 직원들이 요청하는 소스(source)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영국 직원들도 큰 산을 하나 넘었다고 생각하는 듯 한숨을 돌리며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회의를 계기로 영국 직원들은 나를 더 신뢰하게 된 듯했다. 한국 회사 직원이 영국으로 파견근무를 가야 한다는 업무 협의를 했을 때 한국의 파견 직원은 필요 없다고 강하게 피력했던 영국 게임회사의 게임 운영팀장도 나에게 고마워하며 우리가 영국 사무실에서 업무 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원치 않던 파견 근무였지만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서 게임 플레이 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회사에서는 나를 신임하는 듯했다. 나에게 해외영업팀과 각 나라의 해외 파견자들을 총괄하는 직책이 주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선택해야 했다.
대학졸업 후 나는 대학원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취직을 했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일단 직장을 다니고 경력을 쌓으며 내가 모은 돈으로 대학원을 갈 것이며 대학원에 합격할 때까지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기로 말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아껴서 저축했기에 돈도 어느 정도 모았고 내가 목표로 한 대학원에 지원할 준비도 되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바로 JPT성적. 나는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을 목표로 준비했다. 입학 전형에 필요한 TEPS 성적은 만들어놨는데 내가 선택한 제2외국어인 일본어 성적이 부족했다. 회사 다니면서 퇴근 후 학원도 다니고 혼자 공부도 했지만 커트라인인 600점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더 나이 들기 전에 대학원에 입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단을 내렸다. 회사를 그만두고 JPT시험에 올인한 후에 대학원에 지원해서 입학하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