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괜찮은 순간들(2023.3.6)
밥상머리에서 하는 부부의 대화
남편과 얘기를 하면, 돈얘기, 자녀얘기,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들 얘기뿐이다. 결혼 10년 차쯤 되면 인생의 설레는 일들보다 차가운 현실과 무거운 책임감이 피부로 느껴지는 때인 것 같다. 경제적 문제는 죽을 때까지 고민으로 가져간다고 다독이면서도 욱하니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무엇일까?
밥상을 차리는 것도 정신없다. 5명의 밥상을 차리면서 오롯이 내 몫인양 차리다가 가끔은 욱한다. 왜 이게 온전히 내 몫인가. 그러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지. 했다가 참 그지 같은 역할분담 같기도 하다. 했다가 그러면 네가 죽어라 돈 벌어봐라 그건 쉬운가. 하며 나를 채근했다가. 어찌어찌 밥상을 차려낸다.
밥을 먹으려고 5명이 둘러앉으면, 어떤 때는 어머님의 날카로운 말에 분위기가 싸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남편의 불만 가득한 말에 듣기 불편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서둘러 밥을 빠르게 먹고 일어나 버린다. 말 섞기 싫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주 앉아 밥 먹는 게 더 체할 것 같은 분위기였기도 하고 가끔 아무 말이 없을 땐 어색해서이기도 하다.
최근에 한 애착검사에 거부회피형 인간으로 검증된 나는 <가까운 사람과 정서적 관계를 맺지 않고 지내는 걸 편안하게 느낀다.>라고 스스로가 생각한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지? 가족보다 혼자 있는 걸 편안하다고 여기고, 혼자 있고 싶다고 엄청 이야기한다. 정서적 관계를 맺어본 적이 있어야 이런 것도 잘하지. 해본 적이 없으니 어색하고 같이 있을 때 뭘 해야 할지 막연하고 두렵다. 편안하게 느껴서 혼자 있기를 선택하기보다 가족이랑 치대고 부대끼고 소통하고 같이 잘 지내고 할 자신도 없어서 도망치는 것이다.
밥상머리가 나에게 그런 불편한 자리이다. 마음의 거리는 먼 것 같은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둘러 앉은 자리가 나에게는 너무 어색한 것이다. 가족이 싫은 건가? 그런 감정은 아닌데, 복합적인 감정이다. 있어서 든든한데, 같이 있으면 어색하고, 가족이라는 어떤 형식이 주는 부담감이 있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따뜻하고 정감 있고 화목한 이런 느낌. 그런데 현실 가족은 그렇지 않으니 거기에서 오는 괴리감과 관계의 어려움과 가족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들 때마다 드는 죄책감 등이 힘든 것 같다.
남편과 오랜 만에 감정 빼고 생각을 주고받는 대화를 했다. 우리는 몸이 지치면 자주 싸운다. 몸과 마음이 다 지치면 정말 대화가 없다. 그런데 오늘은 밥상을 다 차리고, 내가 한숨 돌리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무슨 말로 시작했을까?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자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참.. 나도 나다. 그런데 오늘은 남편의 이야기를 가만 듣다가 생각하길 <남편이 좋은 아빠구나>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자식에게 하는 행동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만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 방식이 싫었다. 그리고 양육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도, 남편은 이상하게 어느 포인트에서 나랑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양육에 대한 고민과 결론도 나 혼자서 내리고 만다. 그리고 서브처럼 남편이 나에게 맞추어 주어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데 남편이 첫째 아이와의 대화한 내용을 나에게 말한다. 오랜만에 아이와 진솔한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고,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온다.
<내가 대화를 하면서 느낀 건 이런 식으로 내가 아이에게 점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처음이라 잘 모르니까 점검을 받아서 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겠구나 싶더라고.>
점검을 받는 아빠라, 참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이 사람도 엄청 노력하는구나 싶었다. 나와 생각의 차이가 나서 그동안은 늘 마음으로 듣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의 밥상머리 대화가 꽤 괜찮았다. 남편이 최근 하던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다. 나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첫째와 둘째에게 우리가 너무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아. 첫째는 뭐든지 다 잔소리하는데, 둘째는 똑같은 행동을 해도 허용하는 범위가 넓은 것 같아.>
<그런데 그건 우리가 첫째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 얘기하게 되는 거고, 둘째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넘어가게 되는 거지. 경험의 차이지. 허용의 범위가 다르다기보다.>
이상하게 남편의 말을 기록하고 싶은 건, 나의 양육의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어서일까? 오늘의 밥상머리 대화에서 나는 묘한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말만 잘해서 얄미운 남편인데, 가끔은 이렇게 도움을 주니 고맙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아이를 키워야 할지 아직도 모른다. 존재를 사랑한다는 건 나에게 숙제처럼 어려운 일 같다. 괜찮지 않은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내 눈에 성에 안 차는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그런데 그냥 나의 마음만 감당하고, 오늘처럼 의외로 괜찮은 순간이 오면 좋아하고, 어긋나는 순간이 오면 슬퍼하고 그냥 그렇게 살련다. 지나친 열심은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