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과 암벽등반(23.3.9)
인생은 암벽등반.
밀린 시편을 <깨버린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서 읽었다. 완독은 아니지만, 118편까지 끝냈다. 읽으면서 다윗이 아주 속이 검은 사람이었구나를 깨달았다. 내 일기장을 옮기면 시편이 될까? 생각을 잠시 해보다가 아차차 싶다. 같은 검은색이어도 뭔가 태도가 달라서. 비교할 대상이 못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다윗이 시편이라는 일기장에 원수 망하게 해달라고, 내 눈물이 음식이 되었다고, 어느 때까지 하나님이 내 앞에서 얼굴을 가리겠냐고 막 기도하는 게 너무 시원하다. 내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지. 나는 이게 맞지 않나? 모든 신앙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계신지 계시지 않는지 모르겠고 내 인생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그런 불안함과 막연함 속에 그래도 믿음이란 걸 지켜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사실 더 깊이 가면 이게 믿음이냐 신념이냐까지 생각이 들 때도 온다) 생각이 든다.
예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실내 암벽등반을 하러 갔었다. 암벽등반 높이가 상당히 높았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야 하고, 줄 하나에 기대어 내려와야 한다. 손을 떼도 줄 때문에 안전하지만, 사실 겁 많은 사람들은 시도도 안 한다. 나의 경우는 겁이 많아 쳐다만 봐도 아찔한데, 첫째 아들이 그냥 성큼성큼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벨을 울리고, 줄에 매달려 착륙하는 걸 보고는 새삼 대단하다 생각하며,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난생처음 암벽등반을 해봤는데, 와 이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다. 아래를 보면 무섭고, 위를 보면 까마득하다. 놀이기구도 겁이 많아서 못 타는 내가 암벽등반을 하겠다고 헬멧 쓰고 줄에 매달린 것이다. 그러고 발을 딛기는 했는데, 참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시작한 거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정면만 보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딱 내 눈앞만. 아래도 위도 보지 않았다. 그랬더니 어느새 꼭대기다. 기쁨도 잠시 다시 맨 밑바닥으로 줄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데 떨어지는 건 더 무섭다. 하. 결국 나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발버둥을 치면 안 되는데, 발버둥을 치고 엉덩방아까지 찧어가며 착륙했다. 그런데 묘하게 재밌었다. 거기 서 있는 잘생긴 안전요원들이 시시덕거리며 나를 정말 이상한 아줌마 취급할까 봐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첫째 아들도 나를 모른 척했다) 그래도 재밌길래 혼자 또 도전을 했다. 정면을 보고 올라갔고, 내려올 때는 우스꽝스럽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내려왔다. 그런데 나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암벽등반 후, 혼자 들뜬 마음으로 첫째 아들에게 한 말이 기억난다.
<아들, 엄마 암벽등반 끝까지 잘 해내는 방법을 알았어. 위아래 안 보고 앞만 보면 꼭대기까지 갈 수 있어!>
첫째 아들은 나의 말에 나도 안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경험이 나에게 꽤 오랫동안 인상적이다. 이유는 암벽등반이 인생 같았다. 아래도 위도 보지 말고, 딱 앞만 봐야 하는. 떨어질 때는 몸에 힘을 빼고 서서히 내려와야 하는. 이렇게 살면 80살 인생 힘들지 않고 살지 않을까? 꼭대기에 언제 갈까? 인생의 끝이 무엇일까? 뭐가 있긴 있나? 이 지루하고 힘든 여정을 어떻게 끝내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딱 현재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끝까지 가는 것이다. 혹시나 현재만 열심히 살았는데 쭉 미끄러진다? 그럼 힘을 빼야 그나마 나비처럼 보인다. 우스꽝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다. 내 자신이. 힘을 빼야 미끄러지더라도 땅에 발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통찰력은 있는데 왜 실전에는 약할까?
시편을 읽으며 쌍욕을 멋들어지게 하는 다윗이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원수가 망하게 해 달라는 식의 기도가 너무 예의 있다. 나의 경우는 지랄. 염병. 씨발. 이 더 속이 후련할 때가 많은데, 다윗은 하나님 앞이라 그런지 예의를 차린 것 같았다. 하. 나도 제정신이 아닌가. 뭐라는 건지.
생각만큼이나 인생이 잘 살아지면 좋겠는데, 오늘도 엄마인 나의 모습은 철이 없고 속이 없고, 디지게 싸운 남편 얼굴 봐도 화해할 용기가 없다. 힘들게 일하고 온 어머님 봐도 고생하셨다는 말을 못 전한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나.
내일도 해가 뜬다. 정신 차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