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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국 Mar 10. 2023

결과가 없는데, 지독히도 성실하게 생각한다.

생각을 하기는 하는데, 왜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23.3.10)

지독하다. 내가 나를 봐도 지독하다. 기어이 도서관으로 출근. 성경책 폈다. 시편 완독. 잠언 시작. 나는 성경을 도대체 왜 읽는 걸까? <할 일이 많다>를 입에 달고 사는 나는 늘 무기력하고 표정이 없는 얼굴로 도서관 책상에 앉고, 성경을 보고, 시간을 체크하고, 지원서를 쓰려고 컴퓨터에 앉는다. 할 일이 정말 많은 건가? 내가 해봤자 하는 일. 애들 픽업. 청소. 요리. 도서관에서 성경 읽기. 지원서 쓰기. 브런치 쓰기. 드라마 보기. 애들 숙제 준비물 챙기기 정도인데? 많나? 많다. 많다. 숨이 찬다. 오늘은 병원도 다녀왔다. 그런데 기어이 살아보겠다고 지원서 쓴다. 악착같다.


서울특별시 동부여성발전센터에 교육팀원 공고가 떴다. 생각해 봤다. 나는 왜 일이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거창한 이유는 꿈도 못 꾸겠다. 본질적인 질문은 그냥 나에게 너무 거창하다. 그냥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사무직. 월급 200만 원 이상의 일을 원했다. 이미 포부부터 적합하지 않은 지원자다. 모든 직장의 자격요건을 보면 밝고 긍정적인 인재를 원하는데, 젠장 나는 이미 찌들 대로 찌들어버린 아줌마에 불과하다. 경력도 뭐가 있어야 쓰지. 돈도 벌고 싶으면, 사회적 요건부터 갖춰야 하는데. 늘 시간에 쫓겨 사는 아줌마는 뭔가 억울하다. 집에서 놀지만은 않았는데 마주하는 현실은 늘 매정하다.


<사랑이라 말해요> 요즘 신나게 보는 드라마다. 위로에 자꾸만 기대면, 내가 성장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위로를 회피했는데, 참 사람은 나약했다. 드라마를 보니 실장님이 떠올랐다. 드라마를 보는데, 실장님이 예전에 한 말 <선생님은 자신을 믿고 잘 보낼 수 있어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위로에 기대고 싶었나 보다.


늘 부족할 것 같은 돈과 늘 어긋날 것 같은 가족의 대화, 늘 불안한 나의 사회적 자리, 그리고 늘 부끄러울 것 같은 나 자신, 늘 만족하지 못할 것 같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등 나는 끝없이 생각했다.


이번 이력서는 실업급여를 받고 3번째 이력서이다. 앞으로 3달 남았다. (실업급여 탈 날이). 예전에 박물관에 취업했을 때 10군데 넘게 지원하고 연락받았었다. 그때 내가 정말 박물관 일을 원했나? 아니었다. 단순하게 박물관이 재밌어 보여 지원했다. 본질적 이유는 살아야 하니까 일했다.  나 아닌 다른 합격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합격포기해서 내가 되었다. 20대에 첫 직장도 그런 식이었다. 경력직만 뽑는 자리였는데, 처음으로 신입인 내가 3차 면접까지 통과해서 들어간 거다.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 나 말고 다른 최종합격자가 있었는데, 결격사유가 있어 그 사람을 합격취소시키고 나를 뽑았단다. 내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단순한 능력만 봤다면 나는 그 자리가 아니다. 남들이 말하는 운. 나에게는 은혜가 더불어 여태껏 살아오긴 했다.(이제와 생각해 보면 감히 내가 써서는 안 될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경력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원서를 쓰면서도 자신이 없는 나를 발견한다. 이유가 거창하지 않아서 자신이 없는 걸까? 아님 정말 능력이 없어서 자신이 없는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둘 다이다. 늘. 막상 지원을 하면 적어도 민폐는 되지 않아야 할 텐데 잘할 수 있을까? 뭘 믿고 이런데 지원할까? 말만 잘하고 가서는 멍하니 있는 건 아닐까? 양육과 병행이 가능할까? 죽겠지 뭐. 또 힘들겠지 뭐. 그런데 눈앞의 현실. 마이너스 통장과 앞으로의 들어갈 생활비들을 생각하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니. 괴롭지만 나아가야 한다. 해내야만 한다. 하면서 했던 것 같다.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았는데 이 하나에 뿌리가 3개란다. 주인 닮아 이도 성질이 못됐는지, 뿌리를 이상하게 내렸다. 너무 아프다. 너무 괴롭다. 건드리기만 해도 이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치통이 심할 때는 얼굴 전체가 아픈 것 같다. 그런데 신경치료한 어금니를 보면서 혼자 속으로 기도가 된다. <하나님 제발 이 어금니 발치는 안 하게 해 주세요.> 신경치료가 잘못되면 발치한다는 의사 말이 너무 무섭게 들렸나 보다. 최근에 썩은 사랑니를 빼면서 깨달았다. 작은 충치였을 뿐인데 나는 왜 골이 흔들리는 것처럼 아프게 느꼈을까? 사랑니를 빼자마자 빠진 이를 내 눈으로 확인했다. 신기했다. 아주 작은 부위가 까맣게 되었다. 그런데 빼고 나니 신기하게 골이 아플 정도의 통증이 사라졌다. 이제는 반대쪽 어금니다. 뿌리가 3개 달린 어금니다. 건드리기만 해도 이가 쏟아질 것 같다. 무섭다.


내게 산더미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면 이런 개운한 기분일까? 썩은 사랑니가 빠진 것처럼?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내게 이 문제를 그냥 보고만 놔두실까? 직접 개입하지 않으시고? 웃기다. 하나님을 또 끌어들인다. 내가 직접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도. 내가 스스로 걸어야만 하는 부분에서도. 손 놓고 다 하나님이 해주십시오 하는 듯한. 애 같다. 징징거리고 싶었나 보다. 마흔쯤 되면 나의 징징을 받아주는 사람도 없다. 나에게 산적한 문제들이 썩은 사랑니나 신경치료 중인 이처럼  내 골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이제 더 나이 들면 가족 탓. 과거 탓. 하나님 탓 그 어느 것도 탓할 수 없다. 나의 삶의 결과는 온전히 내 몫이 될 텐데. 하루에 대한 무게감과 책임이 무겁다. 일에 대한 가벼운 접근으로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을까? 이제는 좀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가족들에 대해서도 나의 태도가 이제는 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이 어긋남이 더해지면 더 이상 대화조차 어려워지지 않을까. 나 자신과 세상.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봤다. 생각해 봐도 변하지 않으면 답이 없는데, 골 아프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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