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방관, 동조_24.12.12
오늘 참 글 많이 쓴다.
속 편한 소리 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일단, 나는 뭐라도 써야 잠이라도 잘 것 같다. 괴롭다.
동조... 하지 않는다. 학교의 운영방식에 대해. 그리고 심지어 화가 난다. 너무.
나는 사실 한국 사회에 화가 많이 나 있다. 너무 개인을 소비시키는 이 거지 같은 실상이 미쳐버리겠다. 그래. 소비되고 있다. 미친 피로사회이다. 정말. 나도 아이들도 소비되는 느낌이다. 정말 돈이 없으면, 힘이 없으면 거리에 나앉는 게 현실이라서,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서민들은 뭐라도 하는 거다.
비빌 언덕도 찾아보고, 남들이 돈 좀 번다는 것도 좀 해보고, 공부도 해보고, 정보도 좀 얻어보고, 투자도 좀 해보고...
이 사회가 계엄령을 내려서 과연 민주주의 퇴행되는 것일까?(이 발언이 위험한가?) 나는 사실 교육계에 있으면서, 기독교인이면서 느끼는 바는 학교도 종교도 심지어 가정의 문화도 과거부터 지금까지 전혀 바뀐 게 없다. 갈수록 더 힘들어질 것 같은 예상이 들뿐이다.
조선시대가 따로 없을 정도로, 보이지 않는 계급이 지금도 아주 당연스럽게 우리 안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돈을 벌려고 하고, 공부를 하려고 하고, 직급을 따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보니까 그런 것 아니냐.(왜 어른들은 쓸데없는 말을 아이들에게 하느냔 말이다. 세상의 민낯을 알려주는 것 아니냐. 순진하면 결국 아이들이 다치니까. 걱정 어린 마음에.)
그럼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 것이냐는 말이다.
학교를 그만둔다는 것에 나의 의미는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정적 압박, 남편이 얘기해서가 아니라 <방향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같지 않다>는 뜻이다. (한 가지 사회생활 하면서 습득한 스킬은 굳이 내 의견이 이렇게 피력할 필요가 없더라. 구조 속의 이상한 낌새를 내가 눈치챘다면 남도 이미 눈치챘다. 문제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구조에 남기로 한 것일 뿐.)
참.
답답하다.
돈. 필요하다. 내가 호기롭게 퇴사한다고, 뭐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구조속에서 늘 침묵만 하고 괜찮은 척할 수가 없다. 내가 소비되는 건 괜찮으나 학교의 운영방식으로 인해 아이들이 소비되게 둘 수는 없다. 내 아이도 걸려 있고, 당신들의 아이들도 걸려있다. 나는 이 점이 너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교육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나.
심지어 기독교 교육이 이 정도라면, 다른 데는 어떨까.
우리 사회가 소비사회라는 건 알겠지만, 나의 침묵이 방관이 되고, 결국에는 구조에 동조하는 꼴이 되었다. 나는 그게 너무 괴롭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는 교육이 아니라 소비하고 있는 것일 뿐임을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일까?
구조속에 남아 있는 어른들은 그럼 뭐지? 무조건 다 잘못된 것일까? 사실 나는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숙함이 있을 수 있다.
80살이 되어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삶의 모순적인 부분이 얼마나 많은데,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많지 않은가. 그러면 그때마다 개인으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직급의 높음과 낮음, 빈부의 격차, 성별차이, 영향력 차이 등이 있겠지만, 결국 한 개인의 생각이 참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자꾸 구조 탓, 현실 탓을 하려는 게 아니라, 자꾸 나 자신에게 묻고 싶은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교무실은 나를 밀어냈다. 이유는 받아주기에도 교원자격증이 없으니 민망하다. 그래서 교육지원실로 보냈다. 교육지원실은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께서 나름 생각하셔서 행정+잡다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나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행정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예산은 없고 직업활동은 돌려야 한다. 교감선생님이 유일하게 도와주시지만, 사실 이분도 올해 처음 교감직을 맡아 본인 업무처리에 급급하고, 회피인지 방어인지 답답한 의사소통 때문에 나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분이 아이디어를 많이 내주셔서 1년을 버텼다. 실제로 나의 모든 주된 업무는 직업활동+ 돌봄 교사로 업무가 끝난다. 그런데 교육지원실에 왔으면, 교육지원실의 일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시점인 것이다.
교장선생님이나 리더급 사이에서는 이미 학교에서 큰 배려를 해줌으로 자리 하나 만들어준 것이다 생각한다. (그러니 결과를 내라.)
(옆의 선생님은 이미 당신의 실력은 1년 동안 다 보여줌으로 끝났다. 그게 네 실력이다.라고 말한다.)
집에서는 매달 월급, 지출, 수입 얘기가 오고 간다. 이대로 괜찮겠는가. 우리 가정의 재정상태. 너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늘 마이너스. 카드값이 나올 때마다 남편은 인상이 찌푸려진다. 안정적이지 않는 내 직장도 맘에 들지 않고, 비용이 드는 기독대안학교를 보내는 것도 벅차다. 아이들이 학교를 좋아해서 다행이지만 나의 솔직한 학교에 대한 발언 덕분에 남편은 학교를 다 끊어내길 바란다. 결국 기대했던 바와 다름으로 나오자는 거다. 그뿐인가. 일이 끝남과 동시에 집안일과 분투한다. 그건 사실 우리 집 식구들이 비슷하지만, 이상하게 나에게 양도되는 것이 훨씬 많다. 경제력의 차이에서 나 또한 그러려니 하며 당연스럽게 해 왔던 것들이 체력이 지치면 폭발폭발폭발하고야 만다.
그런데 난 대안이 없어서 고민이 깊어진다.
교육의 민낯을 아주 깊이 봤다. 그리고 내가 하는 고민 자체가 정말 별 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교육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내 가정을 보면 미래가 보이는데 너무 멀리서 기관과 종교를 쫓아다니지 않았나 싶었다. 당장 자존심을 내려놓고, 가족들에게 사과 한마디조차 제대로 못하는데, 나가서 일한다고 난리치고 집안꼴 엉망되고, 누굴 돌보겠다는 건지. 게다가 집안꼴도 꼴인데... 교회는 왜 가는 건지.
홀려서 교육하고, 홀려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가정생활도 어디서 들은 대로 하는 게 아니었다. Real이었다. 실체는 텍스트보다 더 강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남들은 뭐 그렇게까지 생각해... 하겠지만, 이게 진짜 삶이라서, 국민들이 시위하는 것 아닌가 싶다.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건, 바른 마음과 생각, 정도를 가는 것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재정상태만 봐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늘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잘못되었다. 날마다 카드값을 보며 드는 생각인 것이다. 집에 흘러넘치는 물건들. 늘 부족하다 여기는 마음의 결핍. 기도를 하는데, 이 기도는 결국 욕심 아닌가 싶어 관두고 만다.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밖에 기도하지 못하나 현타가 찾아올 때 고개를 숙이고 마는 것이다.
이전에 근무했던 박물관 실장님을 존경했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분도 양면은 존재했다.) 이 분은 자신이 박물관을 퇴사할 때, <나 자신이 너무 비루해진 것 같아 관둔다>라고 했었다.
나도 그렇다. 밥벌이가 너무 쉽지 않았고, 가족들이랑 같이 부딪히며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더 쉽지 않은 건 내 의도가 생각보다 불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너무 쉽게 자행되고, 악습처럼 끝없이 흘러넘쳐서 괴로웠단 사실이다. 결국 나도 나 살자고 침묵, 방관, 동조를 한 셈인 것이다. 옳지 못한 것을 자꾸 묵인하면, 사람은 악해서 쉽게 타협한다. 내가 그 꼴이라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