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 Kim Jan 22. 2018

변화와 보존, 그 어딘가에 멈춰져 있는 <몽상가들>

외부로부터 깨지지 않기 위해, 당신을 초대한 거야.



들어가기 전에: 내가 초대받은 세 가지의 세계에 대하여


내게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알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이다. 그것이 삶이든, 사랑이든, 미래든, 범지구적인 인류애든 상관없다. 뭐든 좋으니 어떤 가치에 대한 한 사람의 집요함에 빠져들고 싶다. 감독이 만든 '어떤 세계'에 완벽히 몰입해서, 감독이 하고자 하는 '어떤 말'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시간 내내 감독의 세계관을 좇는 일이다.


완벽한 몰입의 세계를 만드는 감독, 그 존경스러운 창작자의 세계에 흡수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이 나에게 새로운 생각을 준다면 신선한 충격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다면 흥분이고, 전혀 상반된 의미를 준다면 무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새로운 고민거리는 아주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도 있다. 나는 영화를 봄으로써, '감독'이 만든 세계에 초대장을 들고 기꺼이 찾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초대’ 받은 세 개의 세계를 잊지 못하겠다. 그것은 바로 <로렌스 애니웨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그리고 <몽상가들>이다. 이 영화들은 매우 집요했고, 신선했으며, 질문거리를 수북하게 가져다주었다. 세 편의 영화 모두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가졌지만, 전혀 평범하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사랑에 대하여 집요하게 늘어지지만, 그 사랑의 주체들이 모두 여자다. <로렌스 애니웨이>는 35살부터 10년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와 그 남자의 애인의 관계 변화에 대해 집중한다. <몽상가들>은 몸만 커버리고, 둘 만의 이상 속에 스스로 갇혀있는 남매와 그 세계에 현실을 알려주고 싶은 친구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그중 굳이 한 편을 고르라면 <몽상가들>을 뽑는다. 감독이 '가장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하고 싶은 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집요함을 사랑한다. 





세계를 변하고 싶은, 멈추고 싶은 
- 그 어딘가에 멈춰져 있는 <몽상가들(The Dreamers,2003)>   


<몽상가들> 기본 정보                       
- 원작 : The Dreamers (2003) * 국내 개봉 2005 / 재개봉 2014.02
- 감독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 주연 : 에바 그린(이사벨), 루이스 가렐(테오), 마이클 피트(매튜)       



- 1968년 파리 ‘시네마테크’ 시위의 현장에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68년의 파리다. 남자 주인공 매튜는 이 당시 불어를 배우러 파리에 온 미국인이다. 파리에 온 뒤, 영화에 완전히 빠져서 지하 영화클럽에도 가입할 정도로, 영화가 삶이 된 청년이다. 어느 날 애용하는 영화관 ‘시네마테크’에 가니 관장이 해고되었고 영화인들의 시위가 한창이었다.


시위 장소인 ‘시네마테크’는 장르불문의 모든 영화들을 틀어주는 곳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곧 감독의 생각(사상)이 관중들에게 호응을 받음을 뜻한다. 그것이 호불호든, 무관심이든 말이다. 그러므로 각종 장르를 상영한다는 것은, 곧 다양한 사상들의 공존을 말하며 큰 의미에서 자유를 말한다. 이런 자유로운 사상이 오가는 곳의 수장을 해고했다는 것은, 곧 영화 상영 제한에 대한 경고며 이는 사상의 억압으로 이어질 것이다. 마치 독재정치 속에서는 언론이 가장 먼저 봉쇄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사상의 자유를 위협당하는 영화인들은 궐기를 일으킨다. 이런 뜨거운 장소에서 매튜는 이사벨과 테오 쌍둥이 남매를 만난다. 이사벨이 매튜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영화를 매개로 매튜는 이사벨과 테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다음 날, 매튜는 이사벨과 테오의 집으로 초대받는다. 그다음 날엔 남매의 부모님이 한 달 간의 여행을 떠남으로써, 셋의 동거가 시작된다. 그렇게 매튜는 남매의 공간에 들어간다.



- 허물 따위 걸칠 것 없는 우리 사이

남매는 매튜에게 거리낌이 없다. 남자건 여자건 옷을 훌훌 벗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영화는 살색의 향연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염하다', '야하다', 또는 '관능적이다'등의 섹슈얼적인 생각이 강하게 들지 않는다.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그냥 5살 어린아이들이 벗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건 이런 남매의 행동에 매튜는 당황했지만, (그리고 나도 당황스러웠지만) 곧 남매 자체가 서로에게 가리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자벨과 테오는 성인이 되었지만 같은 침대 위에서 옷을 다 벗고 같이 자고, 같이 씻는다. 매튜는 이런 게 이상하다. 하지만 통계상 3명 중 2명이 그러니, 과반 이상의 66%의 지지도로 그 세계는 남매가 주도한다.


이사벨과 테오, 매튜의 공통점은 영화다. 셋은 늘 영화 이야기를 하고, 영화 속 인물을 흉내는 퀴즈를 내고, 영화 속 대사를 이야기하면서 의견을 공유한다. 이사벨과 테오는 영화 속에서 사는 게 일상 같고, 매튜는 그런 남매에게 매력을 느낀다. 쌍둥이로서, 서로가 ‘또 다른 나’ 임을 자청하며 모든 것을 공유하는 남매 자체가 영화 같다.

영화 퀴즈에 틀린 테오에게 이사벨이 내린 벌칙은 공개적 자위행위다. 방청객은 이사벨과 매튜다. 경악 속에서 매튜는 벌칙을 수행한다. 그리고 얼마 후 테오는 퀴즈에 틀린 이사벨에게 매튜와 함께 자기 앞에서 잘 것을 말한다. 매튜는 이사벨을 좋아했지만 이런 황당한 벌칙에 도망친다. 그러나 곧 남매에게 잡혀서 이사벨과 매튜는 함께 잔다. 자신이 이사벨의 첫 번째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매튜는 강렬한 사랑을 느낀다. 그렇게 셋은 사랑과 욕망에 흥청망청 감성을 쏟아붓는다.



- 애인조차 끼어들 수 없는 남매 사이

 매튜는 이사벨과 연인 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사벨은 테오를 더 사랑한다. 매튜는 이사벨에게 테오와 분리된 독립적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그 시도는 테오가 다른 여자를 방에 데려옴으로써, 이사벨이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실패하게 된다. 이사벨은 테오를 그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아하며, 테오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아한다. 둘이 항상 영원하길 바란다.


테오는 자신이 이사벨과 샴쌍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둘의 사랑을 이어준 것은 테오다. 그런데 테오는 일부러 이런 짓을 행한 것 같다. 자신이 이사벨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사벨도 테오도, 벌칙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은밀한 성적 행위들을 서로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둘 사이에,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음을 서로가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모르면 궁금하고 말 그대로 궁금해 미칠 수도 있고, 의심과 망상이 심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이에는 오히려 의심이 없고 홀가분할까?


 테오는 매튜에게 언제나 셋이 함께일 수 없음을 경고한다. 셋의 동거가 길어질수록, 매튜에게 이사벨과 테오는 점점 한 명의 사람 같아진다. 둘은 둘 만의 세계에 점점 응집력을 키워간다.


매튜는 그런 둘에게 현실을 직시시키는 사람이다. 둘의 균열을 외부에서 깨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런 역할로 매튜는 둘의 세계에 초대되었을 것이다. 어느새 매튜도 그 둘의 사이가 자연스레 이해되기 시작된다. 그 둘은 서로의 세계에 응집되어 있으며, 정말로 한 사람 같다. 


매튜는 어느새 이사벨이 사랑하는 것이 곧 테오를 사랑하는 것이라 느껴진다. 매튜는 이사벨과 테오에게 진실된 사랑을 맹세하고 싶다. 그러나 남매는 변태적인 성적 행위 시도로 매튜를 화나게 한다. 매튜는 남매에게 현실을 일깨워주고 싶다. 성인 남매끼리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둘 만의 세계에서 제발 나와서 현실을 보라고 매튜는 온몸으로 소리친다. 그 세계의 비주류인, 1/3인 33%인 매튜가 둘의 세계를 변화시키려 한다.


변화하려는, 변화를 하지 않으려는, 변화시키려는 주인공들


- 변화에 응하는 각자의 방법

그리고 파리 내의 시위는 점점 격동적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집 안에서 서로의 세계에 들어가고, 경계하고, 변화시키려는 사이 시내는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다. 이제는 모두가 시위대가 되어 혁명을 요구한다.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주던 천막을 만든 채, 그 안에서 행복에 겨워서 발가벗은 채 곤히 자고 있던 셋은, 날아온 돌멩이에 유리창이 깨진 것을 보고는 그제야 외부 상황을 알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부모님은 그들 셋이 서로 엉켜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수표를 써주신 뒤 다시 나가신 후다. 처음으로 깨어난 이사벨을 이 사실을 알고는 절망한 뒤 자살시도를 하려고 하던 후다.  


셋은 혁명의 거리로 나간다. 테오는 시위의 선두가 되고 싶다. 매튜는 이 방법은 폭력적이라며 테오를 말린다. 극단의 방법이 아닌 이성으로 판단하길 원하지만, 테오는 매튜를 거부하고, 이사벨도 테오와 함께 시위대 앞으로 나아간다. 매튜는 멀어져 가는 둘을 바라보다 시위대 밖으로 나간다. 테오와 이사벨은, 경찰 무리 앞까지 돌진해서는 화염병(불 붙인 술병)을 날린다. 그것을 시작으로 대기 중이던 경찰 무리는 시위대 앞으로 돌진한다. 스크린 앞으로 돌진하며 영화는 끝난다. 




외부로부터의 균열을 두려워하던 이자벨과 테오 남매의 세계는, 결국 유리창을 깨버린 돌멩이로 모든 것이 박살나버린다. 언제까지 온실 속에서 욕망과 본능에 충실하며 지낼 수 없다고, 밖에서 날아온 돌멩이는 말한다. 매튜는 산산조각 난 남매들의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빠져나온다. 그에게는 더 이상 남매의 삶이 매력적이지 않다. 그는 또 다른 현실을 찾아갈 것이다. 다시, 모두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이렇게 누군가는 계속 그 세계에 멈춰져 있으려 하고, 누군가는 변하기 위해 떠난다. 그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2014)


All copyright reserved @ botong on jukBox
www.brunch.co.kr/@dailybotong

 



작가의 이전글 1년 동안 소설만 쓴 결과 보고: 시간을 믿는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