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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Oct 10. 2018

유서처럼 써 내려간다.

지금, 어쩌면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취준생의 고통과 실연의 괴로움과는 좀 달라.


처음 슬럼프가 왔던 건 작년 5월쯤. 습작 시작하고 5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어떤 현상을 겪는지 몰랐다. 그냥 출구 없는 원형통에 잠겨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좀 더 날것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만난 것 같다. 취업 막바지에 자꾸 최종에서 떨어져서 힘들 때랑은 좀 달랐다. 이별 후에 폐인처럼 누워서 내가 교통사고라도 나야 좀 보러 와주려나, 아냐 안 오겠지, 하던 때랑도 달랐고.


취준생일 땐 회사에 입사하면 되고 이별 후에는 재회를 바라며 내가 뭔가 노력할 수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목표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그런 레이스에서 허우적대다가 결국 고꾸라져서 알 수도 없는 곳을 나뒹구는 것 같았다.



24시간 아주 날것의 감정들에 노출됐던 날들.


시간이 좀 지나서야 내가 지금 마주하는 게 두려움, 불안, 공포 같은 감정임을 인지했다. 처음으로 불면증을 겪었고, 신경쇠약이 뭔지, 심부전증이 뭔지 조금 느꼈다. 아침에 억지로 자려고 하면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처럼 요동쳤으니까. 심장이 이불 위를 나뒹굴 것처럼 요동치는데, 호흡은 점점 느려졌다. 해는 이미 떠서 방 안을 비추는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속에서 누가 피부 근처 세포들을 전부 중앙으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따끔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생각했다.
아, 이러다 이따가 눈 뜨는 일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이불에 누운 채로 천천히 방 안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보는 장면들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죽는구나, 이러다 죽는구나 - 이런 느낌이 아니라 이게 나의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겸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모든 글을 유서처럼 써 내려갔다.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쓰는 글이라는 심정으로. 만약 내가 못 일어나면 이게 내가 쓴 마지막 글이 될 테니까. 그럼 좀 더 잘 써야지, 이런 생각으로. 건강히 오래오래 살고 싶고, 누구보다 죽기 싫어하는 사람에 가깝지만 - 그때는 삶에 아무 미련이 없었다. 그저 좀 괜찮은 글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럼 글을 안 쓰면 괜찮아지려나.


절대 아니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괴로웠던 거라 글을 안 쓰면 더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글을 쓰는 게 다른 생각을 안 할 수 있어서 괜찮았다. 그래서 그때는, 글을 쓰는 거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데, 내 글이 나오는 공간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한 달 정도 서재에서 나가지 않았다. 책상에서 타자를 두드리다가, 바닥에 웅크리고 괴로워하다가 다시 일어나서 뭔가를 적다가 또 괴로워하고의 반복.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생각에 잠식되는 게 더 두려웠기 때문에 아침이 올 때까지 꾸역꾸역 - 한 문장, 또 한 문장, 그렇게 한 문단, 한쪽씩 완성해갔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느낀 박탈감


그때를 떠올리면 그냥 무겁다. 되게 무거운 돛을 다리에 달고 가라앉지 않으려고 겨우 수면 위에 얼굴만 올리고 뻐끔대는 느낌.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뭔가를 했다.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어떻게든 방출해야 했다. 분명 내 머릿속에는 딱딱딱딱 - 설계도로 그려있는 이야기가 글자로 표현된 것은 완전 딴판이라서,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대로 써지지 않았기 때문에 - 마음처럼 안됐기 때문에 - 심한 박탈감과 분노, 공포, 뭐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슬럼프가 끝나고 찾아온 진짜 공포


소설을 완성하고 나니까 상태가 괜찮아졌다. 진짜 거짓말 같다는 건 이럴 때 써야 한다고 느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니 몸도 가벼워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그러자 지난 상황들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남이 말해주지 않아도,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있었음을 알았다. 스스로 늪으로 돌진하더니 자유형, 배영, 평영... 종목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허덕이고 있었다고. 내가 알던 내 모습이 전혀 아닌 것 같고.... 그러자 좀 무서워졌다.



난 힘든데 넌 좋으니


그렇게 완성한 글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더 무서워졌다. 나는 너무 힘들었는데, 겨우 빠져나왔는데 내 글은 정 반대의 상황을 겪었다니.... 문득 이런 상황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단지 처음, 시작일 뿐이라고. 내가 계속 글을 쓴다면 이런 시기를 몇 번이나 계속 거쳐야 될 거라고. 그런 느낌이 밀려왔다.



* 그런 느낌일수록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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