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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Jan 13. 2019

당신 옆에 앉은 사람이 진짜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삭막한 세상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폭염에 녹아내리던 어느 날, D가 길상사에 가자고 연락이 왔다. 길상사?


“근데 너 천주교 아니었어?”

“맞는데, 이번에 신자 수업 좀 들어보게.”


불교의 교리를 따라 시어머니를 이해해보겠다는 D의 목소리가 확고했다. 하긴, D는 요즘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았다. D는 늘 고개를 조아린다. 내 잘못이오, 내 잘못이오. 그녀의 시어머니는 답한다. 그래,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썩 물러가거라.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D와 만나는 날, 아침. 환승을 하려고 4호선을 기다리는데 줄이 길었다. 다행히 4호선 안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안으로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열차 안이 자리를 찾는 사람들로 부산스러웠다. 나도 비어있는 자리로 돌진했다. 내 옆에도 누군가 앉았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통로를 서성이는 사람들의 신발을 내려다보며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만의 승리감을 느꼈다.


백 팩을 감싸 안고 느리게 눈만 깜박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옆에 앉은 사람들도 모두 휴대폰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D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연락을 할까 고민하다가 한성대입구역이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옆에 앉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가방을 메고 사람들이 서있는 문 앞으로 갔다. 내 옆에 앉았던 여자가 앞쪽에 서있었다. 나는 묘한 기시감에 D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내 앞에 서있던 여자의 목소리와 수화기로 들리는 D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야, 나 너 뒤.”


  내 앞에 서있던 여자가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뭐냐? 그 사이 출입문이 열렸고 나는 여전히 놀라고 있는 D와 문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지하철 역 안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아와 아이스초코를 시켰다.


“진짜 삭막한 세상이다. 어떻게 옆에 앉았는데 못 알아볼 수가 있냐?”


“내 말이. 이게 소설이었어 봐. 개연성 없다고 난리 났지. 진짜 소설은 현실을 못 이겨. 현실엔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많잖아.”


  “근데 너 어디서 갈아탔는데?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역.”


  “헐, 나도.”


  “그럼 우리 쭉 같이 앉아왔단 말이야?”


  “그런가 봐. 이게 현대사회의 현실이야.”


나와 친구는 조금 충격을 받아서 차가운 음료만 마셨다. 어떻게 내 옆에 앉은 친구를 못 알아볼 수가 있지? 그것도 10분 정도 같이 앉아서 오고 심지어 같은 역에서 탔는데. 하지만 보통 지하철에서 옆에 누가 앉아있는지 확인하기는 힘들다. 어쩌다 시선이 닿는 곳은 사람들의 다리나 신발, 다리에 얹어진 손이나 가방 정도. 굳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면 서로 불쾌하고 이상한 사람이라 오해받기 쉽다. 그래서 애초에 옆에 누가 있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목적지도 다른 사람이고, 지하철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오늘처럼 잘 아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라 단정 짓기도 한다.


  “이건 뭐, 당신 옆에 앉은 사람이 진짜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거 아니냐?”


  “공익광고가 나오는 이유가 있었네.”


그 후로도 우리는 몇 번이나 ‘삭막한 현실’‘현대사회의 인간’ 또는 ‘비정한 현대사회의 현실’ 같은 디스토피아적 단어를 던지다가 길상사로 올라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우리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고, 지하철에서의 일이 생각나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근데 너 진짜 난 줄 몰랐어?"


"캡 모자 쓰고 백팬 맨 사람 앉기에 그냥 한성대 다니는 학생인 줄 알았지."


"그래~?"


"... 또 좋아한다. "

  

 우리는 털털거리며 언덕을 올라가는 마을버스 안에서 낄낄거렸다. 삭막한 현실이든 비정한 현대사회든 어떠랴. 내 옆에 앉았던 진짜 친구를 못 알아본들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날 인연을 만날테니까. 지금은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진짜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러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삭막한 세상에서 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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