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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Jan 13. 2019

슬럼프를 팝니다.

한 때 누구나 가지고 있던, 점점 잊혀져가는 날 선 감각에 집중함

장례식장에 갔다가 오랜만에 대학 동기 R을 만났다. R은 최근에 회사를 옮겼다며, 요즘에 글은 잘 써지냐고 물었다. 나는 울적한 목소리로 요즘 글이 너무 안 써져서 괴로웠다고 답했다. 이번에도 슬럼프가 왔었던 것 같고, 난 벗어날 수 없겠지.


“그래도 멋있다. 내 주변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너랑 M밖에 없거든. SNS로 너네 소식 들을 때마다 너무 부러워.”   


R의 말에 속이 먹먹해져서 맥주 캔만 만지작거렸다. 소설을 쓴다고 하면 종종 ‘멋지다, 부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R은 지금 내 통장 잔고가 0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부러워할까? 이번에도 엄마한테 돈 빌려야 하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지 며칠을 고민하는데?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볼펜 떨어지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부러울까?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고, 작업실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데. 정말 이 삶이 멋있어 보인다고? 진짜? 


며칠 후, 친한 오빠와 동생과의 점심 모임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다. 


“넌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한 다는 게 멋있어.”


독립적 인격체로서 개인과 최근에 느낀 고독감에 대해 말하던 중이었다. 순간 R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근데, 저는 대체 뭐가 멋있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난 가난하고 외로운데. 내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다들 부럽다고 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진짜 모르겠어요.” 


습작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힌 것은 경제적 어려움과 고독감이었다. 급할 때 도움을 청할 가족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스스로가 느끼는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글을 써야 하나, 도대체 이게 뭐라고.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몰아붙였지만, 감당해야 하는 감정들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물론 가끔, 나락을 헤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것은 한계의 다른 이름이고, 숨겨놓았던 감정들의 민낯이다. 인간으로서 나의 존재에 대해 더 깊게 파고들어서 오래도록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거기서 빠져서 나올 수 없으니까 버티고만 있는 건데. 정말 내가 멋있어 보인다고?


바닥으로, 더, 더, 바닥으로.


“너 요즘 느낀 감정이 외로움과 고독감이라고 했지? 나는 정말 고독해지고 싶어. 혼자 있고 싶은데, 하루 종일 회사에 있다가 집에 가면 육아에 시달려. 그런 게 부럽다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못 하잖아. 지금의 안정적인 현실을 포기할 수 없거든, 점점 더.”


“맞아.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어딘가 둔해지는 것 같거든. 하는 말만 하게 되고, 패턴이 생기니까. 그런데 언니가 말하는 건 다른 감정들이니까 아, 나도 한 때 이런 생각을 했었지 하고 깨닫게 되더라고. 감각들이 좀 뾰족하게 깨어나는 기분이야.”


“그러니까. 그런 감정이나 인생에 대한 생각은 사실 회사 생활하면서 생각하는 게 아니거든. 일 처리하기 바쁘니까. 그런데 너 만나면 완전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대체 얘는 무슨 이야기를 하나 더 신경 쓰고 귀 기울여서 듣게 돼.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을 고민하다 보면 뭔가 깨우치고, 내가 좀 더 똑똑해지는 기분이야.”


오빠와 동생의 말을 듣다 보니 회사생활을 하느라 바쁘게 지내던 날들이 떠올랐다. 집에 오면 쓰러져 자고, 아침에는 눈뜨자마자 뛰쳐나가던 날들. 누군가 써놓았던 보고서들을 레퍼런스 삼아 비슷하지만 새로운 보고서를 만들고, 결정권자들의 취향에 맞게끔 내용과 형식을 선별했다. 얼마나 획기적인 내용인가? 보다는 대표가 마음에 들어하는가? 가 중요했다. 선택받아져야만 했으니까. 


어느 날은 내 하루가 남의 것이라 느껴져서 속이 텅 빈 것처럼 휑해졌다. 그럴 땐 서점에 가서 아무 책이나 들여다보다가 마음에 드는 글귀가 있는 책을 사 왔다. 나도 한 때 인생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은데, 사랑에 설렜던 것 같은데, 자아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은데. 가끔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너무 멀리 떨어진 것만 같아서 울적해졌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회의감이 몰려오던 시간들. 


그때를 떠올리자 사람들이 ‘멋있다’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됐다. 그들은 나의 가난과 고독감에 대해 말하고 있는게 아니었다. 한 때 누구나 날카롭게 가지고 있었던, 그러나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만의 날 선 감각에 여전히 집중한다는 사실이 부러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나는 내가 맞닥뜨린 감정들을 굳이 외면하지 않고 더 깊게 파고들어볼까 한다. 내 삶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지지해주는 나의 사람들을 울타리삼아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볼까 한다. 그 안에 숨어있는 삶의 의지를 찾아 꺼내놓기 위해서라도 - 나는 슬럼프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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