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이면 모두가 천재인 세상에서 살자고.
습작 1년 차가 끝나면서 내가 소설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깔끔하게 접었다. 만약 내가 천재라면, 하루만에 단편을 썼을 것이고, 처음 쓴 소설로 두어 달 만에 등단을 했겠지. 그리고 이런 인터뷰를 하겠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걸 한 번 써봤는데요?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내가 천재가 아님을 인정하자, 인내의 시간들이 찾아왔다. 매일매일 글을 쓰고 고쳤다. 글 외의 일들은 우선순위들에서 밀려났다. 주변 사람들과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졌다. 공감대가 다른 상황에 자주 놓였다.
외로웠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이런 식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에 빠졌다. 나와 같은 감정을 겪는 사람들을 만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다.
작가들이 쓴 글쓰기 에세이를 미친듯이 읽었다. 그들은 어떻게 외로움과 고독감을 극복했는지 알고싶었다.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에는 내가 겪은 이중성에 대한 일들이 명확한 문장으로 적혀 있었다. 무려 이중성만 한 챕터였고, 글을 쓰다보면 이중성을 느끼는 게 당연한거라고 말해줘서 안심이 됐다. 나만 이런 게 아니란 걸 알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창작하는 자아가 커진 뒤, 공포심을 느꼈다. 내 안에 다른 누구가가 생겼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나는 이제 이중인격자로 살아야 하나, 좌절했다. 사실은 정신분열이 왔다고 생각했다. 참담했다. 도러시아 브랜디는 내가 공포심을 느꼈던 이중성이야말로 천재성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내가 천재라고?
흥미로웠다.
나의 천재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앞선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내가 습작을 해온 지난 7년은 실패의 시간이 아니다. 무의식 속 아주 깊은 곳에 숨어있던 창작하는 자아를 발견하고, 독립된 개체로 성장시키는 기간이었다. 내가 그동안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감정에 이끌려가며) 두 개의 각기 다른 자아를 분리하고 성장시킨 일이 나의 천재성이다. 이 천재성이 작가적 창작능력이 아니라면, 그냥 집요함과 끈기의 천재라고 하자. 이름이야 알아서 붙이면 된다.
혹시 내가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레하다가, ‘천재’나 ‘예술가’라는 명사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음을 알았다.
예술가나 천재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과 기대감이 부담스러웠다. 단어가 주는 허황과 환상에 빠지기 싫었다. 예술가보다는 창작자로, 천재보다는 훈련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몇 시간이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머릿속 빈 공간을 상상으로 그리고 채워가는 건축가에 가까웠다. 그냥 도닦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천재라면 뭐 어떤가 싶다.
모두가 자기만의 고유한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을까? 다만 언제, 어떻게 발견하는지 그 시기와 방법이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그 고유성을 쉽게 발견하고, 드러낸다. 누군가는 오랜 시간을 거쳐서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또 매우 오랜 시간을 걸려서 세상 밖으로 내보인다. 어떤 사람이 80대에 화가가 될 때, 누군가는 60대에 작가가 된다. 단어의 무게 때문에, 나부터 수많은 천재들을 과소평가 한 건 아닐지 반성했다.
역량과 시기의 차이일 뿐,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분명 고유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냥 내가 천재라고 믿고, 도전하고 용기내야 한다. 살아갈 날은 많고, 어떤 분야에서든 천재가 될 기회는 널렸으니까. 무엇보다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좀 더 설레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천재가 많아질 수록 훨씬 다채로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는 천재로 태어난다.
언제 발휘될 지 모르는 고유의 천재성을 가진 스스로를 응원하고, 보듬어 주자.
기왕 사는 거, 천재로 살거나 언젠가의 천재가 될 나를 발견해보자.
일단 나부터.
진짜일지도 몰라, 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