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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Mar 30. 2022

지금의 눈으로 다시쓰기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나는 성장하기에 해석은 계속 달라진다. 

거의 반 년만에 브런치 로그인했다. 작가의 서랍에 가니까 발행취소한 글들이 발행한 글의 2~3배는 되는 것 같았다. 무슨 글이길래 이랬나, 하고 둘러보다가 17개 정도 다시 발행했다. 주로 습작 1,2년차에 썼던 습작생과 글쓰기에 대한 글이었다. 


어느 순간 예전 글을 다시 보니까 부끄러웠다. 나 뭘 이렇게 다 내뱉은거야, 이런 공개적인 곳에? 심지어 일기도 아니고? 정말 초심자는 겁이 없고 부끄러움은 더 없다. 왜냐면 쓰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기 때문에. 있는 건 열망 뿐이다. 


그때의 나는 '쓰고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에 10시간, 11시간씩 쭉 앉아서 어떻게 썼나 싶지만, 그만큼 뱉고 싶었다. 아주 활활 타올라서, 뭐든 장작삼아 썼다. 내 안에 있는, 이 타오르는 것들 좀 봐달라고. 이걸 나만 갖고 있어야 되겠냐고. 제가 하는 말들 좀 봐주세요, 하고 여기저기 무작위로 얘기하고 있던 거지. 무엇보다 그게 좋았다. 쓰고있는 상태의 내가. 


그 열망이 3,4년 후에 다시 보려니 좀, 민망했다. 그래서 많은 글들을 비공개로 돌렸다. 그쯤 되니 예전에 쓴 글에서 고칠 게 너무 많이 보였다. 이렇게 날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또 다른 열망, 그러니까 잘 쓴 글들만 내놓고 싶은 열망이 앞섰기에 이전에 쓴 글들은 숨겼다. 습작 연차가 늘어나면서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잘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점이 뭐냐. 잘 쓰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인데, 실제로 잘 쓰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항상 이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 한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뭘 써도 마음에 안들기 때문에, 분명 오랜 시간 투자한 것에 비해 결과물이 늘 미비했다. 하다 만 것들도 많고. 이 시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 '잘 쓰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마무리 한다.' 


쓰고싶다는 열망은 잘 쓰고싶다는 열망으로 진화했고 이를 위해 완성을 하는 책임감을 요구했다.


완성은 책임감이다. 일을 벌려놓고 수습을 하겠다는 의지다. 내 마음대로 안 써지면 정말, 다 때려치고 싶다. 이걸? 왜? 이게 내가 원하던 거야?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마무리를 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능력이다. 꼭 글 뿐만 아니고, 어떤 일이든 완성을 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래서 일단 완성을 하면, 어느정도 라인 안에는 들 수 있다. 완성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특히나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진 사람이, 이 글은 망했다-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완성하는 것은 굉장히 괴롭고 자존심 상한다. 하지만 그냥 벌려놓고 수습하지 않으면 발전할 가능성이 사라짐을 알았다. 가능성 앞에서 자존심 같은 건 버려야지. 


솔직히 어떤 글은 쓰고 나서 나는 굉장히 만족한다. 잘 썼는데? 괜찮은데? 이상하게도 나만 만족할 경우가 많다. 어떤 건 진짜 별로다,라고 생각해도 남들은 괜찮은데?할 때도 있고. 뭐가 어찌될지 모르기에, 일단 끝까지 써놔야 한다. 괜찮게 시작한 글이 결론에서 급 마무리되고, 힘이 빠지는 이유는 이상한 게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같은 에너지로 마무리하는 것은 프로의 일이었고, 갈수록 에너지가 증폭된다? 대단한 사람이 쓴 글이다. 용두사미가 괜히 나왔겠냐고. 원래 이상은 크고, 현실은 빈약하다. 그 빈약한 현실을 좀 더 풍족하게 채워주어야 한다. 그게 퇴고다. 



완성된 글이 중요한 이유는, 시간이 글을 숙성시켜주기 때문이다. 밀가루나 김치처럼 글도 숙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숙성이 어떻게 나오냐면, 글을 쓰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글을 쓰는 사람이 성장하면, 글도 숙성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꿔 말하면, 글을 쓰는 자신이 성장하면 글 역시 성장한다. 내가 3살때 알던 것과 5살에 아는 것이 다른 것처럼. 대학교 1학년이 아는 것과 4학년이 아는 세상이 다른 것처럼. 소설은 오래 살수록잘 쓰는 산문이라고 하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 소설은 쓸 수록 잘 쓸 수 있는 산문이다. 소설은 성실하게 꾸준히 쓸 수록 잘 쓰는 산문이다. 에세이도 그럴 것이고, 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산문이 그렇지 않을까? 스스로 성장하는 만큼, 글이 성장하고 가능성이 확대된다니 너무 설레잖아? 


몇 개월 전부터 나는 내가 어느 단계에는 이르렀음을 알았다. 7년 전, 습작 초기에는 질문을 던지는 단계였다면, 7년이 흐른 지금은 그 질문들에 답해 줄 수 있는 상태로 성장했다. 성장이라니, 너무 벅차잖아. 예전에 쓴 글들을 솔직히 다시 읽지는 못하겠는데, 그때의 질문을 지금의 눈으로 다시 쓰고 싶은 열망이 높아졌다. 예전에는 질문에서 끝났지만, 이제는 마무리까지 하고 싶어서. 내가 그 답을 어쩌면 알아낸 것 같아서. 


물론 이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내 시각이 확대되고, 사고가 확장되고, 세상이 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을 원하는대로 표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이상은 여전히 높다. 그런데 그 이상을 꼭 끌어내리고 싶지 않다. 내가 더 성장하고, 내가 더 커지면 되니까. 내가 더 잘 쓰면 되잖아. 내가 처음에 생각한 것, 그 감각, 그 꿈과 이상이 늘 맞다. 다만 그 때는 아직 그런 거대한 것들을 품지 못했을 때라서, 그 이상을 품기 위해 나는 성장해왔다. 



그러니 굳이, 이상을 축소하고 눈을 낮출필요 없다. 나를 키우면 돼. 내가 더 큰 사람이 되면 돼. 내가 이상을 품을 수 있는 상태까지 커지면, 내가 던진 질문들의 답이 보이게 된다. 물론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거의 10년 동안 훈련한건데, 인생의 10%를 원하는 꿈에 투자 못하면 뭘 하겠어. 10년에서 끝날 거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예전의 글들을 발행한 이유는, 과거의 내가 그렇게 생각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잘 쓴 글만 내보이고 싶던 시기가 있었다. 성장하는 사람은 시작과 끝이 다르지. 굳이 이전에 드러냈던 날것의 마음까지 숨길 필요가 있나 싶다. 그것도 나고, 이것도 나고, 다음도 나고. 부끄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면, 맞아 내가 그랬어, 하고 담담히 넘길 시기도 있는 거고.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시각에서 예전의 글을을 어떻게 써낼 수 있을까, 하는 거지. 과거의 일들은 이미 지나간 사실이라 이제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지금 시각에서 다시 쓰고 싶다. 이 작업은 생각보다 힘들고 나는 늘 스트레스 받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가 제일 쉽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난관은 뚫고 지나가야 성장하는 법이니까.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내가 생각했던 그 감이 맞길 바란다. 아마 맞을걸. 늘 맞았으니까. 이번에도 나는, 내가 맞았다고 보여주면 되는거다. 좀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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