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끝이 아니기를. 부디 잘, '다녀오겠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이 개봉했다. 2017년 <너의 이름은>, 2019년 <날씨의 아이>, 2023년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총 8년에 걸친 재난 3부작 시리즈 중 마지막이다. 이번에도 전작에 이어, 여고생이 주인공이다. 어른이 아니라 10대가 재난의 시대에 희망이라는 거지.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히어로물에 여자가 주인공일 때는 그녀가 진짜 주인공인지, 주인공인 척하는 조연인지 봐야 한다. 전작 <날씨의 아이>에서는 주인공이 도구적으로 쓰였다. 신의 제물로, 남고생이 각성하는 계기로. 그래서 혹평이 많았고, 나도 관람 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주인공으로 다른 누가 와도, 이야기가 풀렸다. 작화가 뛰어나도 캐릭터가 별로면, 이야기는 최악이 된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스즈메여야지만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번에도 여고생 '스즈메'는 남대생 '소타'를 각성시킨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주인공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삶의 의미를 깨닫고, 변화한다.
좋은 판타지 레퍼런스의 발견
내 입장, 그러니까 장르문학 창작자이자 웹에 글을 쓰게 될 사람으로서(=유료연재를 할 사람으로서)보자면, 좋은 판타지 레퍼런스를 발견했다.
나는 그 관점에서 이야기를 분석해볼까 한다. 다른 이야기들은 넘쳐날 테니.
영화를 보면서 웹소설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야기는 사건 위주로 흘러간다.
등교하던 스즈메가 폐허를 찾는 소타를 만난다. 학교에 가던 스즈메가 이상한 기분에 소타를 찾아간다. 폐허에 도착한 스즈메가 이상한 문을 발견한다. 스즈메가 요석을 뽑자 고양이가 돼서 달아난다. 점심시간에 학교로 간 스즈메는 산에서 나오는 이상한 광경(미미즈)을 목격한다. 친구들은 보지 못한다. 진도 경보가 울리고, 스즈메는 미미즈가 나오는 곳, 폐허에서 자신이 발견한 문으로 달려간다. 자신이 아까 열었던 문으로 미미즈가 나오고 있다. 그 문을 닫으려는 소타를 발견한다. 스즈메는 소타를 도와 문을 닫는다.
이 내용이 체감상 5분 안에 진행된다. 조금 놓치면 끝이다. 일단 스즈메와 같이 달려가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마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결제를 누르듯,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소타가 의자로 변한다.
이럴 수가. 남자주인공이 의자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다리가 세 개뿐이다? 그런데 잘 달린다? 날아다닌다?
사실 어떤 건물이든 문이 될 수 있는 건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남주가 의자가 되고, 끝날 때까지 의자인 채로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점을, '의자'를 활용해서 잘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거슬리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시시했을법한 것도, 의자가 되니 낯설었다.
결국 한계를 두지 않는 상상력이란 관점의 변화다. 사람 말고 사물로 바꾸니, 이야기가 흥미롭게 진행된다.
제목답게 영화의 메인 소재는 당연히 '문'이다. 이 문은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즈메는 졸지에 일본열도를 횡단하며, 여러 개의 문을 찾는다. 당연히 문을 찾는 이유는 결국 그녀와 연결돼 있다. 스즈메는 계속 문을 찾고, 닫는 행위, 즉 문단속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수행의 이유는, 스즈메가 관동대지진의 피해자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스즈메는 계속해서 문을 찾는다. 문을 닫는다. 지진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하나의 큰 서사를 따라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중심축이 되어주어야 한다. 의외로 많은 이야기에서 메인 서사가 중간에 사라지거나, 튀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같이 따라가는 사람도 길을 잃어버린다.
메인 서사는 길이다. 따라가는 사람이 길을 잃게 하면 안 된다.
이야기는 뒤에 가서 평행세계를 가져오는데, 꼭 그래야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요즘엔 뭐든 멀티버스가 대세니까. 그래서 뒤에 가서 조금 복잡해진다. 꼬인 느낌이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잘 알겠다. 이미 너무 유명한 명제들이다.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
물론 이 연출 때문에 앞부분이 흥미롭다. 꼬마 스즈메가 만난 어른은 누굴까 호기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에서 갑자기 '그것은 나였다.'가 되면서, 뭔가 꼬였다는 생각이 든다. 타임라인은 또 어떻게 되는 건데, 엉켜버리고.
멀티버스가 다 해결책은 아닌데. 다른 방법으로 더 단순하게 풀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면 이제 앞부분도 바뀌어야 하겠지만.
그 외 여러 오브제와 메타포들이 있지만(계속 키를 돌리는 스즈메 등) 이 정도면 레퍼런스 줄기로 충분하다. 왜냐면 이제, 가장 중요한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메시지: 삶에 대한 열망
2011년의 관동대지진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일본을 뒤흔들었다. 그 일은 일본 창작자들에게도 무수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게 분명하다. <너의 이름은>도 그렇고,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재해에 대한 상실감과 무력감이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할 수만 있다면, 막고 싶다는 마음.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현실에서는 재해를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픽션에서만큼은, 재해를 막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픽션은 뭐든 되잖아.
나는 이 집념이,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의 전부라 생각한다.
막고 싶었어, 어떻게서든.
현실에서 안 되면, 저세계를 만들어서라도 막고 싶었어.
아마 그들은 살고 싶었을 테니까.
'다녀왔습니다.'의 부재.
스즈메가 찾아다니는 곳은, 지금이야 폐허가 됐지만 한 때 평범한 곳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하루를 누리던 곳. 그래서 내일도 당연히, 평범한 하루가 이어지리라 믿었던 곳. 그들은 집을 나가기 전 말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혹은 '잘 다녀올게.'
하지만 어느 날, '다녀오겠습니다.' 혹은 '잘 다녀올게'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다. 재해가 그들의 삶을 덮쳐버렸다. 그래서 그들의 '다녀오겠습니다.' 혹은 '잘 다녀올게'는 마지막 말이 되어버린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재해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백화점, 육교, 지하철, 선박, 그리고 한 동네. '다녀오려고 했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 슬픔과 고통은, 그들을 기다렸던 사람들의 몫이 된다.
'다녀왔습니다.'의 부재를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차마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 말을 염원하고 있음을 안다. 아마 세상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이 영화는 '내일도 이어졌으면 하는 삶'에 대해 말한다. 살고자 하는 열망. 이것은 부귀영화나 장수를 누리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과는 다른 의미다. 적어도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은 듣었으면 하는 염원이다. 마무리지었어야 하는 하루가, 뺏기지 않길 바라는 염원이다.
하지만 재해는 공평하다.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기회를 빼앗아가 버린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애석하게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p.s ost로 '꿈속으로'가 나와서 추억에 잠깐 잠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