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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Jan 05. 2017

인생의 첫, '내' 작업실에 입성하다.

뭐든 좋으니, 잡히는 대로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써보자고.

이제부터 이곳이 나의 새로운 터다. 비록 잠시뿐이라 해도.


다음 문장 쓰는 걸 잊게 만든 어니언링. 크림생맥주 2,500원 / 어니언링 3,900원. @ bitterseet (인하대후문)


작업실에 도착했을 땐 저녁 9시 30분쯤이었다. 트렁크를 끌고 마당을 지나는데, 한 중년 남성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웃으시며 내게 새로 온 학생이냐고 물었다. 웃는 모습이 정다운 분이셨다. 그는 내게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라고 하셨다. 내가 올라가도 된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하셨다. 아저씨가 3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원래 설정됐던 4자리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에 들어갔다.


방은 어두웠다. 그리고 차가웠다. 벽에 붙은 스위치를 켜도 그대로였다. 나는 두꺼비집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에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문은 열어둔 채였다.) 아주머니도 웃으며 반겨주셨다. 하지만 그녀도 어둠에 당황해했다. 옷장 문을 여니까 두꺼비집이 나왔다. 아주머니는 쓰레기나 재활용 (근데 까먹은 것 같아.) 방법을 얘기해주시고 불편한 점은 바로 전화 달라고 하셨다. 주인 부부 내외가 모두 인상이 좋고 친절했다. 덕분에 기나길고 힘들었던 4시간의 여정을 조금 잊었다 (다 잊지는 않았다...!).   


새로 리모델링된 방이라 깨끗했다. 침대, 세탁기, 옷장, 책장, 전자레인지, 인덕션 등 풀옵션이라 좋았다. 게다가 방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새것이었다. 심지어 냉장고는 집에 있는 것보다 컸다. 나는 패딩을 입은 채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짐 정리라기보다는, 짐을 풀어헤쳤다고 정정하도록 하겠다. 트렁크를 열고 나를 힘들게 했던 짐덩이 들을 다 꺼냈다. 문구류에서 칼을 꺼내서, 6호 박스를 뜯었다. 스카치테이프를 좍좍 뜯는데, 괜히 손이 두꺼워지는 느낌이었다.  방바닥은 서걱서걱했고, 내가 데려온 검댕이들이 조금 묻었다. 마대 걸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물 한 통도 없었다. 그러니 배가 고팠지만 일단 매트리스 비닐을 뜯었다.


시트와 담요를 깔고, 극세사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원래 베개를 안 배긴 했지만, 없으니까 허전했다. 역시, 없어 봐야 그 존재를 알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방바닥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나는 더욱더 배가 고파왔다. 게다가 공유기가 없어서 인터넷을 쓸 수 없었다. 인터넷은 공짠데.


다 귀찮다, 그냥 잘까... 하는데 오늘 글을 안 올렸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작심삼일도 넘겼는데, 4일째에 이런 난관이! 게다가 배가 고파서 그냥 잘 수도 없었다. 나는 노트북을 넣은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마당은 어두웠다. 문을 닫는데, 위층 복도가 환해졌다. 약간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내가 서있는 문 쪽으로 왔다.


"어디 나가요? 추울까 봐 핫초코 가져왔는데, "


이 세상에 핫초코를 주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 @나의 새 방 책상 위


핫초코라니! 커피도 아니고 핫초코라니!


아주머니는 뜨겁다며 휴지로 아래를 감싼 핫초코를 가리켰다. 핫초코라니! 커피도 아니고 핫초코라니! 카페인을 마시면 밤을 꼴딱 새워야 하는 카페인 취약자 나의 취향을 단번에 저격하신 핫초코라니! 내가 매일 한 잔씩 먹던 그 핫초코라니! 게다가 이렇게 배고플 때 핫초코라니! 짐 싸던 중 당이 떨어져서, 할리스에 다니는 친구가 샘플로 주었던 진핫 핫초코 가루를 찾아 10여분 이상 헤맸던 (그러나 못 찾았다. 어디 있니) 내가 또다시 이렇게 당이 떨어져서 빌빌댈 때 핫초코라니! - 이상 핫초코 예찬론은 마치도록 하겠다.


아주머니는 배가 고프겠다고 걱정하면서 나중에 먹으라고 핫초코를 방 안에 넣어주셨다 (사식?). 나는 우선 방에 들어왔다. 컵이 매우 뜨거웠다.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홀짝거리다 보니 이미 핫초코가 사라졌다. 빈 속에 먹으니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원래는 돌아와서 마시려고 했는데, 핫초코 앞에서 장사 없다지, 암.


뱃속도 따뜻하고, 아주머니 정도 따뜻하고. 좋은 집 얻었네, 내 동생. 나는 조금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유독 빛나는 골목이 있길래 그곳으로 걸어갔다. 술집과, 취한 젊은이들을 보고 확신했다.  

아, 인하대가 근처에 있구먼.


역시나 그곳은 인하대로 통했다.


어니언링이 무쟈게 맛있어서 고난했던 4시간을 모두 잊기로 했다.


와우, 이곳은 유흥 신세계. 물가가 싸다고 했는데, 정말 싸다. 떡볶이 3,000원, 1인 피자 세트 6,000원, 통닭 6,500원, 맥주 2,500원 등등. 그래서인지 방학인데 술집이 대부분 다 찼고, 거리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인하대학교 앞 까지 쭉 걸어가면서 상점들을 체크하고, 오는 길에 점찍어놓았던 가게로 들어갔다. 카페에 갈까 했는데 이미 핫초코를 마셔버렸기도 했고, 맥주 한 잔 마시고 싶기도 했다. 내가 들어간 곳은 가게도 넓고, 책상도 넓어서 노트북 하나 올려놓아도 괜찮았다. 사람도 많이 없고, 와이파이도 되고.  


나는 수제 어니언링과 크림 생맥주를 주문했다. 3,900원인데 비주얼이 굉장히 훌륭했다. 맛은 더 좋았다. 바삭한 게 너무 맛있어서, 나는 '타도 9200번!'을 그만두었다. 2시간 걸릴 거리를 4시간 걸렸다는 사실도 잊었다.


지하철이 미래다
강남역에서 인천으로 오는 버스 중, 9200번 버스 줄이 제일 길다.
저녁 6~7시는 어디나 그렇지만 강남역은 정말 교통지옥이다. 트래픽노잼잼잼.
9200번 버스에는 짐칸이 없다. 손잡이는 있지만, 페이크였어. 트렁크 들고 가는 순간 민폐....


자리를 뺏기고, 기껏 트렁크 올렸다가 팔운동만 하고. 5분 뒤에 온다고 다른 버스 타랬지만, 이미 두 번째 버스였고 그 후 20분 기다렸어요, 아저씨.... 나는 온갖 힘을 발휘해 트렁크를 끌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갈아탄 지하철은 너무나도 편하고 좋았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방바닥도 밋밋하고. 나도 모르게 계단에 미리 겁먹은 게 실수였다. 하필 파리(Paris) 지하철 계단에서 고생하던 게 생각날 게 뭐람.... 그건 정말 심했다, 계단 천국에 기동기는 아무것도 없었지. 생각 그만.


그저 나는 새 집으로 오는 내내 생각했다.

"지하철이 미래다, 지하철이 미래다. 지하철, 화이팅."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뿐이었다. 버스 타서 개고생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래, 내 잘못이었음을 어니언링일 가르쳐주었다.


어니언링 한 조각에

- 맞아, 짐은 모조리 보냈어야 했다. 26kg짜리 책이 끝일 줄 알았다 (이거 보내고 또 앓아누웠었지). 노트랑 원고들이 이렇게 무거울 줄이야.

어니언링 두 조각에

- 차를 사야 했다, 왜 면허도 안 딴 거야? 지금은 비록 차는 - 티백을 사는 게 전부긴 하지만.

어니언링 대여섯 조각에

- 그리고 또, 트렁크를 10kg을 넘게 싸지 말아야 한다. 안 그러면 트렁크에 내가 질질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 손 가득히 짐을 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나는 어느새 혼자 남은 술집에서, 식어서 아까만 못한 어니언링을 포크로 콕 찍으며 4번째 글을 쓴다.

인생 첫 혼술 라이프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 사이 두 팀이 들어와서 시끌벅적한 가게에서, 과거가 된 풍경사진. @Bitters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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