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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제인 Oct 08. 2020

[Aug keyword: 8월] 접착력

  폭우다. 여름 한가운데에서 에어컨 바람도 없이 맞는 새벽은 며칠간 퍼부은 비에도 모자라 요란하다. 낮에 물웅덩이를 지나는 차 소리가 내내 요란했는데 밤까지 소음이 가득하다. 책상과 방바닥에서 내 살이 불쾌한 촉감으로 떼어질 때마다 쩍쩍 소리에 비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나가 샤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내 흐린 구름의 날들이 지나면서,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쉽게 피폐해지곤 한다.

 

  ‘바삭한 햇빛’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나는 광합성이 고프다. 싫어하던 비를 이제 막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건만 아, 이 정도까지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축축하고 매서운 8월은 가끔 번쩍- 하고는 쿠쿠 궁- 소리를 낸다. 코로나가 몇 달간 지나고 있는 ‘착한’ 지구에서 인간에게 화를 내는 소리란 이 정도 수준의 데시벨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런 날이면 괜히 온기마저 고프다. 집에 가면 밥솥에 언제나 보온되어 있는 밥처럼 거기 그 자리에 따뜻하게 있어 주는 존재들. 내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이 되는 곳들. 시시껄렁한 얘기에도 싱거운 웃음을 짓던 지루한 관계들. 휴대폰 구석구석을 뒤적이다 내려놓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누구에게 보여서는 안 될 위험한 빈틈이다. 나 이외의 관계들 사이에서 나는 '외로움'이란 누구에게 들켜선 안 될 감정으로 취급한다. 특별히 이성의 감정이 없는 이성에게도 나는 그렇게 부드러운 선을 긋고, 웃으면서 무례하다.


  연인 관계였던 사람이 가끔 떠오른다고 해도 연락한 적이 없었던 것은 그저 구질구질하기 싫어서였다. 깊은 잠에 들지 않았을 법한 이런 새벽 즈음 ‘자니...?’하며 묻고는 답장이 없는 다음날 아침에 앞구르기 여섯 번쯤 해도 괜찮을 용감함이 없다는 핑계다.


  지나간 사람에게 남는 감정이란 사실 별 것 없다. 그 사람과 잘 됐더라면, 내가 조금 더 뭔가를 했더라면 어땠을까의 후회는 기어코 나를 위한 반성일 뿐, 그 사람과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은 관계가 끝나는 동시에 사라진다. 그러나 내게도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란 이런 새벽녘에도 영감을 준다. 평온한 나에게 가끔 떠올라 여러 감정의 너울을 선사하는 존재가 존재하기도 하고, 반대로 도무지 기억하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오래되었다는 허무함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어느 쪽이든 나를 스쳐간 이가 좋았을지언정 현재는 내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데에는 공통된다. 미워하지도 미련을 남기지도 않는 딱 그 정도.






  표정과 말투에서 묻어나는 비언어적인 표현들은 어땠을지 몰라도 어떤 이와의 진한 관계가 되면 무척 끈적거린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집착과 거리가 멀다. 나의 사랑이 진득하여 너만큼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까 와 같은 당뇨병 직전의 말을 듣기도 한 반면 어쩌면 이렇게 매몰차냐는 얘기도 들었다. 나의 내면, 그러니까 머릿속에서는 그를 물고 핥았다가 헤집어도 보지만, 그가 내게 주는 사랑의 크기와 항상 비슷하려 노력했다. 확장되고 거대해지는 곱셈의 법칙이란 내가 만난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나에게 그들은 100%였던 적이 없다. 때로는 3%가 되고 때로는 200%가 되기도 했다. 나는 내 연인을 좋아했지만 좋아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포스트잇처럼 쉽게 떼어지고 어디에도 적당히 붙어있는 그 정도의 접착력, 나는 나의 연인을 그렇게 대했으며 그런 내게 강력본드 같은 사람 하나 없었다.


  어릴 적 껌을 좋아해서 한참 씹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 아침에 껌이 머리카락에 붙어서는 더러 혼나기도 했었다. 얼음을 갖다 대면 살살 떼어지던 껌을 붙잡고 아빠는 회사에서 가져온 시너를 내 머리칼에 묻혀 완벽히 떼어준 적도 있다.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에서 나는 얼음처럼 차갑고 시너처럼 독했다. 그런 내게 강력본드처럼 붙어있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 리라.





  그럼에도 나는 따뜻한 사람이라 자부하고 애쓴다. 내 입에서나 글에서나 자신을 차가운 사람이라고 설명하지만, 나는 본디 따숩다. 한낱 스쳐 지나간 이를 또는 나를 모르는 이를 위해 이토록 친절하고 다정했다는 방증이므로. 요즘 외로웠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건 꺼지라고 말하는 동시에 옷깃을 붙잡는 것과 같은 모양새일까. 내 얼굴에 낀 개기름처럼 썩 불쾌한 새벽이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어울리지 않는 새벽은 따뜻한 믹스커피가 제격이다. 아침까지 잠들기는 글렀다. 동쪽에서 잠시 비추는 햇빛을 쬐고 나서야 순면 이불에 포근히 몸을 뉘일 수 있을 것 같다.


월간사색은 글쓰기에 서툴지만 좋아하는 미니 작가들의 모임: 매월 주제가 다른 작품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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