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나는 아이들에게 손편지를 쓴다
스승의 날이 있었다. 내게는 일곱 번째 스승의 날이다. 해마다 아이들에게 손편지를 쓰는건 끊기지 않는 나만의 전통이 되었다. 육신의 정성을 담아 써나가는 손 글씨는 폰트보다는 예쁘지 않더라도 천천히 읽히는 만큼의 정감이 있다. 아이들의 미래만을 그린 적이 있었다. 20년쯤 지난 일상의 순간들에서 아이들이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고 그 안에서 내가 따뜻하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나아가 가장 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그 미래에 미화되어 존재하고 싶었다. 하지만 경력이 익어갈수록 그 생각도 치기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는 모르는 것이고, 과거도 있는 그대로 기억되지 않는다. 중요한건 지금 이 순간이다. 중요한건 오늘의 아이들을 내가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의 경험과 감정들이 쌓이면 자연스레 아름다운 추억으로 화(化)하겠지.
졸업한 아이들도 많이 찾아온다. 하나같이 웃음꽃이 피었다. 이렇게 잘 웃는 아이들이었나 싶다. 역시 고3 담임이었던 작년의 고생이 조금은 대견하다. 첫 고3을 맡았던 아이들은 벌써 스물넷이 되었다. 한참 청년의 길을 지나고 있다. 그 청년들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존재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은 한다.
편지를 여기에 표본한다.
사랑하는 우리반 아이들에게.
얘들아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사실 만난지 두달 조금 넘은 너희들에게 ‘스승’ 소리 듣는건 낯간지럽고, 스스로 매일 너희 덕분에 나도 배우고 깨닫기에 그 마음을 담아 너희에게 편지를 쓴다. 해마다의 5월에 내 학생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나만의 전통이기도 해. 이 편지를 너희에게 읽어줘야 하는데 해가 갈수록 더 부끄러워지고 사랑한다는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아 점점 걱정도 된다.
고3 얘들아. 많이 힘들지? 오늘만 해도 우리만 학교에 남아 또 책과 씨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도 사실은 마음이 무거워. 한없이 밝고 착한 너희들과 1,2학년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문집을 보면 추억은 죄다 1,2학년 때 만들고 나와는 그저 공부, 대학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 괜히 서운하기도 해. 고3이라는 핑계로 내가 너희에게 최고의 선생님일수는 없겠다. 그래도 그거 아니? 너흰 내게 최고의 아이들이야. 너희는 밤하늘의 별과 같아서 가만히 바라다보면 더 반짝이더구나. 예쁘고 멋진 녀석들이야. 하지만 대입 앞에서 늘 나는 너희의 공부하는 정수리만 본다.
최고의 너희들과 최고의 반을 만들어보고 싶다. 우리 모두 십년 후쯤 ‘그때 고3 참 좋았어. 많이 힘들었지만 떠올리면 웃음이 나.’라고 말했으면 좋겠어. 나는 강물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그리고 너희는 그 안에서 뛰노는 물고기들일거야. 지금은 먼 목적지를 향해 힘든 헤엄을 치고 있지만 내년쯤엔 드넓은 바다를 만나게 될거야. 나는 거기까지만 너희와 함께 할게.
스승의 날이다. 우리 오늘 하루쯤은 우리 반을 가득 가슴에 담고 하루를 보내자. 사랑한다.
2018.05.15.